지난 기획/특집

[나의 유스띠노 시절 ] 8. 신학교 성당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10-24 제 1327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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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실은 제대위에 모셔져
일제하에서도 내부는 원형 그대로 보존
“잘못 다루면 화입는다” 두려워한다 일군
대건학교 정원 중앙 정면에서 보면 이 학교의 구조는 종각을 중심으로 한 서향 2층 건물인데, 1층은 꼭같은 규격의 아아치로 지행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종각을 중심으로 북으로 뻗은 건물은 대신학교요, 남으로 뻗은것은 소현학교였다. 이제부터는 대건학교 대신에 신학교라 칭하겠다.

신학교 종각은 4층 건물로 맨 아래층은 남ㆍ서ㆍ북 삼면의 아아치를 지탱하고 있는 굵은 기둥이 버티고 서있고,기둥과 기둥 사이는 공간으로 비어 있으며 동쪽만은 성당 입구 대문으로 막혀 있다. 이 공간 한 가운데 의당 드리워져 있어야할 鐘줄이 없는 것을 보면, 이 종각 안에 지금 종이 없음을 뜻한다.

이 종은 신학교가 페쇄되었을 때 따로 숨겨두었다가 해방후 남산성당을 건립하고 거기에 옮겨 달았다는 소문이다

이 종의 소리는 아주 좋아서 해방 후 무수한 예배당이 어지럽게 들어서고 다라서 종각도 무수히 들어섰지만, 그들 종각에서는 종소리다운 종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주종술이 어렵다는 것을 말함이리라.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 때 만든「에밀레종」에 관한 해피스러운 전설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성 싶다.

종각 밑에서 성당 정면을 바라 보면 두쪽의 목재 대문이 나선다. 이 대문은 평소에는 닫아 두었다.

이 대문을 들어서면 祭衣室인데, 前面에는 지금 우리가 들어온 대문과 꼭 같은 대문이 보이고 북쪽에는 쪽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문이 제의실로 드나 드는 문이었다.

지금은 칸막이를 해서 옛모습을 찾아볼 길 없으나 이 쪽 문을 열면 옛날에는 아아치 두개 넓이의 공터가 있었고 이 공터에는 성당벽에 기대어 2층 성가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당시 주일날마다 있었던 唱미사 때는 풍금치는 학생과 성가를 선도하는 두 학생이 있어 이들의 지휘 아래 신학생 전부가 성당 안에서 성가를 불렀기 때문에 성가대원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다만 성가대 자리만은 「암보나」라 해서 2층에 따로 마련 되어 있었다.

제의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여기가 성전이다. 내가 여기서 갑자기 이 조그마한 성당을 성전이라 굳이 개칭하는 이유는 이 성당이 다른 성당과는 달리 축성된 성당이라는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전에 들어서서 상상 외로 반가왔던 것은 불품 사납게 퇴락되어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성전 내부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日軍들도 이 성전만은 두려워해서 감히 이 곳에 들어오지 않앗던 것이 아닌가 싶다.

日人들에게는 묘한 習性이 있었는데 그것은『「가미사미」(神)를 모셨던 곳을 함부로 다루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었다. 소위 그들의 神이란 것은 우리가 말하는 신의 관념과는 아주 달라 살아 생전에 위업을 남기고 죽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미사마 즉 神으로 받들었고 비록 그들 자신은 믿지 않는 신이라 하더라도 전에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받들던 神의 堂이면 두려워 해 함부로 드나 들기를 꺼려했다.

그렇다면 전세계가 믿고 받드는 우리 하느님에 대해서야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었으랴.

2차 대전말 엽 일제는 동원령을 내려 여러 교회를 마구 잡이로 몰수, 제덧대로 사용했지만 성당만은 그래로 호락호락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 것은 로마 교황청을 의식한 탓도 컸겠지만 그것보다는 성당은 예배당과는 달리 항상 성체를 모셔 두었기 때문에 신을 모시는 곳이라 여기고 잘못 다루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성당안에 들어오는데 주춤 거렸을 것이다. 그래서 될 수있으면 여기 성당에는 자주 드나들지를 않았을 것이고 혹시 마지 못해 들어 왓더라도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나가 버렸을 것이었기에 다른 곳에 비해 이만큼이나마 비교적 곱게 보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다행한일이다.

성당안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것이 前面벽에 그려져있는, 이 학교의 수호성인인 성 유스띠노께서 邪神에게 향을 피워 호교론을 펴고계시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문외 한인 주제에 평하기란 주제 넘은 일인지 모르나 이 성당의 높이와 넓이를 감안할때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본다.

요사이는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 초상화를 그리는데 뼈만 앙상하게 그린 그림이 유행되는 모양이고 한수 더 떠밭아 이마빡에 붙고 코가 입 아래로 내려 앉고 눈이 대여섯개 되어야 그림 행세를 하는 모양이나 예술은 예술이고 성당은 성당이니 성당에 나오는 분들이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이상, 성당에 모실 그림은 대중이 호흡 할 수 있는 수수한 그림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성당안 위쪽 북편에는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빌고 계시는 성모님이 합장을 하고 계시는 像이 모셔져 있고 남쪽편에게는 예수아기를 안으신 요셉 성인상이 안치 돼있다. 그러고 보면 이 성당안에 성가정을 모신격이된다.

또 수호성인 그림 아래 제대를 모셨는데 이 성당이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전 전에 건립된 관례로 제대위에 감실을 모셨고 감실위에는 십자가를 모셨으며 그 양옆 좌 우로 큰 촛대 3개씩 6개를 배열시켰고 촛대와 촛대 사이에는 화병을 놓아 제단을 꾸몄다.

제단에서 3계단을 내려와 중앙에서서 다시 제단을 향해 돌아서면 그 자리가 입당송을 외우는 자리가 된다.

입당송을 외우는 자리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 곳에 성체 등이 공중에 매달려 밤 낮으로 빨간 빛을 내뿜고있었다.(現 계산동성당에 가보면 이해가 빨리될 줄 안다)이상 말한 곳이 지성소가 되는것이다. 그리고 이 성당이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전에 건립 되었다는 것을 말해둔다.

(계속)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