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유스띠노 시절 ] 4. 구 주교관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8-22 제 1318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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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베란다는 기도의 장소로도 이용
허리에 닿게 가꾸어진 배나무 울타리
司祭피정때 숙소로 이용된「안넥사」
지금은 성모당에서 교구청으로 갈 때 동쪽에 있는 架橋를 건너면 교구청 2층이 되는데 그때는 성모당에서 한 발자국 올라서면 주교관 서쪽 베란다가 되었다. 이 지점이 옛과 모습을 크게 달리 하는 것은 교구청을 신축할 때 더 크게 짓기 위해 부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성모당 경사진 언덕을 直立으로 깎았기 때문이다.

이 어름의 옛모습을 좀 더 상세히 파악하기 위해 발길을 옮겨보자.

성모님께「안녕」을 여쭙고 성모당 서쪽길을 따라 비스듬히 내려오면 마치 회랍 신전을 연상케하는 교구청 4층 건물의 거대한 정문이 나타 난다. 계단을 밟고 바로 올라가면 교구청이요, 오르지 말고 1백 80도 돌아서 내려오면 옛 신학교(지금 대건학교)로 가게 된다.

지금의 교구청 위치는 옛과는 다름이 없으나 건물은 판이하다. 옛날에는 主敎宅, 혹은 주교관이라 했는데 1964년 화재로 소실됐다. 그 집의 특색은 북쪽 현관에서나 서쪽 성모당에서 보면 2층집이나 동쪽에서나 남쪽에서 보면 3층집이란 점이다 그리고 東과 西의 2층에는 꽤 넓은 베란다가 딸려 있었으며 맨 하층은 반지하실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얼른 보기에 어줍잖은것 같으나 기실 기가 막히게 잘 된 구조이다.

겹집이란것이 큰 흠이지만 그것은 대지 관계로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최하층 반 지하실은 가히 일품이었다 굳이 설명을 한다면 해는 원래 동에서 뜨니 동향집이요 아침 일찍 밝아오고 오전 햇볕을 방안 깊숙히 유도한다.

막 떠로으는 햇살은 겨울에는 반갑기 이를 때 없는 것이며 여름이라해도 東西에 베란다가 있으니 이것을 잘 조정하면 별 문제가 없다.

즉 갓 떠오르는 태양은 아직 덜 익어 열기가 약하다. 해가 점점 떠올라 열기가 차차 더해지면 그와 정비례해서 베란다의 그늘도 서서히 늘어난다. 그러니 동쪽 햇빛이 베란다 때문에 방안을 덥게 작용할 수 없다. 동쪽 베란다는 그렇다 치고 서쪽 것은 어떠한가? 서쪽 베란다는 동에 비해 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바람이 동에서 칠때는 서쪽으로 옮겨가면 서쪽 베란다가 진가를 발휘 하게 된다.

보통 가정집에는 몰라도 성직자들을 위해서는 필요한 설비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베란다가 기도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 이다. 미사와 성체 조배는 성당안에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다. 성서 낭독은 방에서 한다 하자. 그러나 머리의 기도 즉 묵상 기도와 로사리오 기도와 성무일도는 어디서 할 것인가.

물론 이것들도 성체 앞에서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렇지만 가뜩이나 운동 부족증에 있는 신부들에게는 베란다를 왔다 갔다하며 기도를 올릴 수 있다면 이 어찌 은혜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베란다가 있을 바에는 폭은 좀 넓어야하고 길이는 길수록 조을것이다.

『대지 1평이 금쪽같은 도심지에서 배부른소리 작작하라』고 꾸중하시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조건이 닿는다면 한번 시도해 보시라는 소리쯤으로 들어두시라.

다음에는 반 지하실인데 전력을 흔전 만전 쓸 수 있는 오늘에야 별 것 아니겠지만 냉방이 귀했던 당시는 가히「일품」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주교관 제일 밑 층에 있었는데 東과 南은 빛과 별이, 또 바람이 잘 드나들수 있게 되어 있고 北과 西는 흙을 모아 올려 완전히 땅밑에 묻히게 했다. 그래서 빛과 온도의 격차를 조정 했는데 주로 포도주를 저장 해두었다.

지금은 교구청 앞에 차고가 있고 2층 식당이있고 정구장이있고 남산 성당이 들어섰고 성당과의 경계를 그은 담과 주차장이 있으며 효성여고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등등…많은 건물들이 어지럽게 숨막히도록 널려있지만 옛날에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대신 성모당 동쪽과 주교관 마당 사이에는 동향으로 비스듬히 경사가져 있었는데(지금의 교구청 식당자리와 정구장자리)여기에 포도원이 있었고 포도원 옆을 따라 길이나 있었는데 길을 따라 비스듬히 내려 오면 포도원이 끝나고 평지가 되는데 여기서 길은 남북으로 갈라져 하나는 주교관 앞마당으로 가고 하나는 포도원 울타리를 따라 남으로 뻗는다. 여기서부터 포도원 울타리를 재미있게 만들었는데 배나무를 허리에 닿도록 낮게 키워 그가지는 양 옆으로만 뻗도록 해서 울타리가 되도록 재통스럽게 가꾸어져 있었다.

울타리 건너편에는 안넥사(부속건물이란 뜻)라는 건물이 길을 향해 서 있었는데 포도원이 끝나는데서 함께 끝난다. 이 건물은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 교구청에있는「安益舍」와는 위치도 건물 양식도 전혀 다른 것이다. 교구청 구내에 있는 한옥을 안익사로 명명한 것은 기왕이면 이 건물과 音이 같게하여 기념 하고자한 의도였다. 이 안넥사 건물은 벽돌 단층집이었고 방수는 여러개 되었는데 신부님 피정 때 한 방에 두분씩 들어가 숙소로 이용 되었다.

안넥사를 지나면 제법 넓직하게 닦은 마당이 나온다. 그 둘레에는 참나무를 여댓 그루 심어서 그늘 지게 하고통 나무 의자도 몇 개 마련해 두었는데 신부님들 피정때 틈틈이 나와 여기서 쉴 수 있도록 마련해 두었다.

여기서 오솔길은 두 갈래가 되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쭉바로 뻗고 하나는 성모당쪽으로 올라가 성모당 옆에 이르러 또 두 갈래가 되는데 하나는 앞서 얘기했던 포도원옆으로 해서 주교관 앞마당과「안넥사」로 통하는 길이 되고 하나는 지금의 남산 성당 사제관(당시는 성당도 사제관도 아직 이곳에 건립되어 있지 않았다)쪽으로 빠져 다시 두 갈래가 되어 하나는 성모당으로 들어가고 하나는 담벽을 따라(그때는 아직 남산성당이 서기전이기 때문에 남산성당 정문이 없었다)남동으로 향했다.

성모당 건립 연도가 내 나이와 같으니 그 때의 일은 알턱이 없으나 지금 성모당이 서있는 지형을 살펴 보건대 산마루를 깎아내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미 말한대로 교구청이 서있는 이 언덕은 원래 동산이었다.

성모당 광장은 꽤 넓은데 이 넓은 마당이 처음부터 산위에 마련 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처음부터 산위에 마련 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드시 인력으로 깎아 내고 메우고 고른 것일게다. 산마루를 깎은 흙을 멀리갔다 버리는 대신 제자리에 메워 평탄케한 것이리라. 또 성모당에서 내려오는것을 살펴보아도 그렇게 추측된다.

(계속)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