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유스띠노 시절 ] 3. 두 신부님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8-15 제 1317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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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전과 플라터너스 울청한 교정
“신부 되려면 아픈걸 잘 참아야지”
그 말씀의 참뜻 깨달은 것은 한참뒤
당시 明治町(지금 계산동) 주임신부님은 요셉 베르 모렐(Joseph Vermorel)이라는 지도 이미 불란서 신부님이었는데 물론 이 분에 대한 평소에 쌓은 신 덕행의 소치였겠지만 다혈질이 보통인 불란서인으로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퍽 유순하시고 인저하신 노인 신부님이었다. 「신학교에 들러 가는 길」이라고 인사를 여쭈었더니 내 양 뺨을 여러 번 때리시면서 『아픈 것을 잘 참겠느냐? 신부가 되려면 이런 아픔도 잘 참을줄 알아야해』하셨다. 어린 소경에도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나마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씀속에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도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더 많은 세월이 흐른다음의 일이었다.

다음으로 보좌 신부님(金永淸·요한)을 뵈러 갔으나 그 분은 이미 다른 본당을 말아 떠나시고 안계셨다. 퍽이나 서운했다.

사실 이 분이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신 분이신데 故人이되신 지도 이미 오래시다. 그러나 이분에 대한 나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것은 아마 이 분에게 각별한 귀여움을 받았기 때문 이리라.

예를 들면 아직 내가 보통학교 다니던 시절 春秋 판공성사 때가 되면 판공 성사를 봐야 하는데 공소와 학교사이가 10여리나 되고 학교를 마치고 고백 성사들 받으러 공소에 도착하면 해거름이 된다. 그 때는 아미 다른 교우들은 모두 성사들 다 본후이고 신부님은 쉬시는 때가 된다. 그렇지만 염치 불구하고 고백 성사를 청하면 『신부될 사람인데 내가 늙었을 때 젊은 동료 신부들과 한패가 돼 나를 괄시하면 안될테니 귀찮지만 성사를 주어야지!』

하시소 곧바로 성사를 주셨다. 평소 농담을 즐기는 분이 아니신데 내게 만은 농시던 분이셨다.

오후 늦게 .明治·聖堂소속 신입생 4명과 함께 신학당으로 갔다.

現 대건중ㆍ고교 정문에 들어서면 마치 옛 송곽을 상기케하는 확강석 축대가 높이 버티고 섰는데 이는 現 남산동 본당주임 신부님으로 계시는 장병보 신부님이 대건중ㆍ고교장으로 계실때 학교 윤동장을 넓히기 위해 부근에 있는 초가와 대지. 조그마한 못을 매입해서 그것을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 쌓은 축대이지 내가 신학교에 처음 들어 갈 때에는 그렇게 前面이 웅장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대건중ㆍ고 정물을 기점으로 해서 그 담벽을 따라 東으로든 西로든 자꾸만 가면 다시 대건중ㆍ고교 정문이 나온다. 이 울안이 모두 교구청 부지이다. 학교 정문 안을 들어서면 옛날에는 교구청으로 올라가는 폭이 약 10여m되는 길이 나오고 그길을 몇 십번 올라가면 옛날에는 학교 수위를 보던 노 부부의 살림집이 길가에 있었고 그 집을 지나 몇 발자국 더 올라가면 신학교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계단을 오르지말고 길을 따라 조금 비슷듬히 올라가면 비로소 교구청이 저 멀리 보인다.

지금은 운동장이 되고 길은 흔적도 날지 않았지만 그 때는 학교 정문 넓이 만한 길이 교구청까지 나 있었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서 교구청이 보이는 곳까지 오면 길밑에 조그마한 대발(竹田)이 운동장 옆에 있었는데 비가 올라치면 이 놈이 체면도 없이 운동장 한가운데 竹葡을 내밀곤 하였다.

내 고장 대구에서는 흔히 대밭을 대나무밭이라하는데 내가 나무에 속하느냐 풀에 속하느냐 풀에 다는 것을 여기에 와서 처음 들었다.

나무라 하자니 1년에 다 굵고 자라서 않으니 풀이요 풀이면 제해서 시들어 져야 하는데 제해에 죽기는 커녕 오래 있을수록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풀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식물학자들의 문제 이며 나로서는 지나치는 길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다.

또 길 양옆에는 두줄로 플라타너스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우거져 있었으며 지금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있는 것에서 東으로 形으로 휘어지는데 그 옆에는 이 동산을 교구에 회사하신 故 許相·선생님의 기념수 老松이 화강석 우리에 섬겨져 있었고 거기서 동편으로 예비와 학생들의 길다란 운동장 일부가 있었다.

플라타너스 · 木의 행렬은 계속 되어 교구청 앞에 이르러 두 갈래도 갈라지는데 한가닥은 西로 향하여 교구 청 西門에 이르러 끝나고 다른 한가닥은 교구청 동편길을 따라 성지자 묘지는 현재 보는바와 같이 검은색과 조화 있게 쌓아 올린 울타리로 물러져 있고 그 바깥 둘레에는 소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들이 들러 싸고 있다. 그때 지 언덕 아래는 돼지를 기르며 살던 중국인 형제가 가꾸던 채 마전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 놈들이 일을 저지른 것은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그 때 중국인이 드나 들기 위한 조그마한 問의 흔적이 아직 효성여고 벽 중문에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

지금의 남산성당도 그 때는 없었으며 지금의 성당과 효고 자리는 둥근 동산이었는데 성묘당과 연이어 있었고 지금 성모당 서편 경사진곳에 우유 짜는 소가 사육 되고 있었다. 성모당은 지금도 보는 바와 같이 성모 동굴 앞 양 세줄 줄지어 서있는데 그때도 그와 같았지만 바닥에 잔디는 깔려 있지 않았다.

(계속)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