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유스띠노 시절 ] 2. 조행「병」의 문제아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8-01 제 1316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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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神學校에 들어오라” 깜짝놀라
어릴때부터 신학교 가기로 점찍혀
神神校는 聖人을 모으는곳이 아니라 神父다운 神父 만드는곳
각선 하고 독자들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정확히는 1930년대 착하기만 하던 백의 민족이 일제의 간악한 수탈에 견디다 못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男眞女戴하여 冷風寒雪의 異域 땅 滿洲로 쫓겨 가던 시대를 상기해보시라. 그 무렵 필자는 우리 집에서 약 15리되는 花園公立普通校 5학년을 마치고 6학년 진급을 앞 둔 봄 방학을 즐기고 있었는데 『내일 곧 신학교에 들어오랍신다』는 전갈을 인편으로 받았다. 바위틈에서 冬眠하던 두꺼비 돌벼락 맞은 것도 유분수지 느닷 없이 『내일 신학교에 들어오라』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아마 이것은 분부를 받은 분이 차일 피일하다가 시간이 임박해서 갑자기 생각이나 헐레벌떡 뛰여온 까닭이리라.

그런데 여기에는 이런 착오가 생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기전만해도 신학생 모집은 3년만에 한번 씩했다.

그것은 아마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신자수가 많지 않았고, 따라서 신학생 지원지 수가 많을리 없으니 매년 모집하기에는 수효가 너무 적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개학도 일반 학교처럼 4월에 하지않고 서구식으로 9월에 가서야 했다. 그래서 정상적이었다면 나는 이듬해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약 6개월 쉬었다가 9월 중순 신학교에 입학 했어야 했다. 그러니 아직 1년6개월 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교회 방침이 아무렵 바뀌어졌다. 종전과는 달리 신학생도 국가에서 公認된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신학교에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그까짓 것 새속 공부가 신부 되는데 필수적인 조건은 될 수 없다.「아는 것이 힘」이라 했으니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요 배우고 또 배워 평생토록 배운다 해도 아직 더 배울 것이 남는 법이니 많이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나 구태여 국가에서 인정 해주는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가? 한심한 일이기는 하지만 「성인도 時代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어찌하랴! 교회도 교회 발전에 발을 맞추어야 했으니 중등 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小神學校가 필요했고 이것이 東星小神學校에서 이루어졌다. (現 가톨릭大 신학부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9월에 개교하던 서구식 방식을 버리고 그 때 시행되던 日式學制로 바뀐것이요 이것이 앞서 말한대로 내게는 돌벼락 격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나로서는 入學期가 예고 없이 1년 6개월이 앞 당겨진 것이다. 그런들 어쩔 것인가. 어느 命이라고 어길 수 있을 것인가? 벌 송아지 코 낄려고 끌고 가는 사람의 뒤를 따르는 어리 둥절한 심정으로 신학교에 인도 되었다. 그러자니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기도서도 제대로 챙기지 모한채 신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다행히 우리 집이 학교와는 30里許에 있었으니 필요하면 그때 그때 기회를 봐서 갖다 나르기로 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동기는 대개 건의 대다수의 경우처럼 부모님들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집은 내 祖父님이 처음 入敎하셔서 당신 자녀들은 물론 온 형제분들까지 신자로 만드셨다니 나는 3代구교인 셈이다. 조부님은 매우 열심하신 분이였고 甘泉里 공소 회장 이셨다. 그때만 해도 공소 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대개 회장 댁 사랑채를 빌려서 춘 · 추 판공성사가 시행 되곤했다. 따라서 춘 · 추판공 때마다 우리집에서 미사가 거행 되었다.

미사 드리는 예식은 이색적이었고 이색적이었기에 호기심 많을 나이의 나는 미사 드리는 신부님의 흉내를 자주 내었다. 열심한 집안인지라 어린 것이 다른 것도 아닌 미사 드리는 흉내를 내는 것이 대견스러웠던지 『너 신부 되였으면 좋겠구나, 너 신학교에 가겠느냐?』하시기에 아무 생각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한 것이 멀미가 되어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신학교를 갈 놈」으로 점찍히게 되었다.

비록 「신학교 갈 놈」으로 점찍히기는 했어도 너무나 어릴 때 일이라 그 것 때문에 내생활 學措에 변화나 구애를 느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뛰 놀앗고 마음대로 게으름을 부렸고 어린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싸움도 많이 해서 操行「丙」을 먹은적도 한 번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丙」을 맞을 만큼 못되게 굴지는 않은 상 싶은데…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때는 한국인이 다니는 학교는 보통학교라 했고 日人들이 다니는 학교는 「尋常小學校」라해서 학교가 달랐고 日人들의 수효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과 서로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가다보면 서로 마주칠 수가 있는데 그때 심술이 動하면 우리들이 그들을 골려 주곤 했다. 日人에 대한 저개심이 유별했거나 민족 의식이 투철해서라기보다 그 나이에 흔히 볼 수 있듯이 이질감에서 오는 객기어린 장난기에서 였을것이다. 이것이 日人선갱한테 들킨것이 조행「丙」을 먹은 원인인상 싶다.

여기 내가 부끄럼을 무릎 쓰고 조행 「丙」맞은 것을 실토 하는 것은 흔히들 『신학교에 들어 갈 아이는 온순하고 착하고 모범적 이여야 만한다』고 생각들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신학교는 신부 만드는 곳이지 이미. 犯人이 된 사람을 끌어 모으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유전병을 지닌 사람이나 고칠수 없는 악습에 젖어 있는 사람은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결함이요 고칠수 있는 「흠」이라면 고쳐가며 교육을 시키는 곳이다.

교육을 받아 가며 비로소 신부는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하며 어떠한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올바로 깨닫게하고 깨달은 것을 실천할 능력이 있는가를 살펴 인정이되면 비로소 서품을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학교에 들어오는 동기는 미신자들이 교회를 찾는 동기에 비할 수 있다.

처음 교회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성 신자들의 권유에 의하는 것이 대다수 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엉뚱한 등기로 입교하는 수도 있다.

예컨대 취직을 하려고, 혹은 교우 처녀를 나꿔채 결혼을 하기 위해, 아니면 출마 했을 때 한표라도 더 얻기위해 등 갖가지의 동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동기의 잘 잘못은 따지지 않는다. 요는 입교해서 참으로 교회의 정신대로 생활하는 사람이 되는 가가 문제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신부가 되려는 첫 동기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참으로 신부다운 신부가 되는가, 아닌가가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 하겠다.

어떤 신부가 미사 강론 중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김」이 먹고 싶어서였다. 그 때 우연히 봉당 신부님 식사하시는 것을 봤는데 하이얀 쌀밥에 기름을 바른 김을 얹어서 잡수 시는 걸 보고 나도 신부가 되면 저렇게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겠지 싶어 신부되기를 결심, 신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한다.

물론 이것은 그 분이 평소 농담을 좋아해서 그랬겠지만 설사 이것이 진담이라 해도 하나도 흠 될 것은 없다.

처음 신학교에 들어온 동기야 어떻든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학교에서 공부해가는 동안 열심히 배우고 갈고 닦아서 차차 올바른 지향, 즉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령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정신을 배양하고 소요되는 학문과 소망되는 덕행을 갖췄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위에 예를 든 신부님은 처음 그 동기가 어떻든 오늘에 있어서는 박식소찬에 만족하시고 자기의무에 충실하며 유머를 남달리 지닌 너그럽고 이름난 모범적인 문제가 아니고 됨됨이가 문제일 따름이다.

신학교 가기로 점찍힌 놈한테 『신학교에 오라』니 비록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갈 수 밖에… 전혀 망설여지지 않는것은 아니었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 「장부일언 중천금」이란 거창한 문자를 알아서가 아니라 그 나이에도 체면이란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고추를 선물로 달고 태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소요되는 물건은 차차 장만키로 하고 우선 집에 있는 옷가지를 어머님이 챙겨 주시는대로 개나리 붓짐에 싸서 걸머지고 본당 신부님을 찾았다.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