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유스띠노 시절 ] 1. 폐교의 아픔을 딛고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7-25 제 1315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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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탄압으로 끝내 폐교
善牧神大개교로 반분은 풀려
匿名독지가의 뜻에따라「聖유스띠노 신학교」로 命名
1914년 開校이래 45년 폐교까지 60명 성직자 배출
서목(書牧)신학 대학이 서울 · 광주 대신 학교에 이어 우리나라 제 3의 사제 양성의 요람으로 금년에 개교를 보게 됐다. 대구에서는 성유스띠노 신학교에 이어 두번째로 문을 열게 된 선목 신대는 학교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신을 聖 유스띠노 신학교에 두고 있다. 차제에 본보는 대구관구 사제 양성의 전당이 될 선목 신대의 뿌리를 성 유스띠노 신학교 출신인 박상태 신부 (대구 비산동주임)의 「나의 유스띠노 신학교시절」을 통해 캐보기로한다.

내가 유스띠노 神學堂(당시는 신학당이라 했고 그때만해도 국가機關의 認司나 간섭을 받지 않고 오로지 敎會法과 方針에따라 운영되던 학교였다) 예비과 (그 당시는 신학교에 처음 들어간 학생을 예비과 학생이라 했다)에 들어간 것이 지금으로부터 꼭 50년이 되다. 「10년이면 江山도 변한다」했으나 그간 江山이 변했어도 다섯번이나 변했을 세월이 흘렀으니 依久한것이란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이 當然之事이겠지만 나의 母校의 경우는 변한것이 아니라 日帝의 탄압에 견디다못해 廢校되고 말았다.

杜甫는 「國破山河在」라 했고 吉再는 「人정傑은 간데 없어도 山川은 依久하다」했는데 내 모교의 경우는 山川이고 人傑이고 할 것 없이 깡그리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 서글픔 어디다 하소연 할 것인가!

그러나 교회나 그 事業은 죽지않는 법, 비록 내 母校 되었고 그 學校의 主保를 유스띠노聖인으로 모셨으니 반분은 풀린 셈이다. 讀者들의 理解를 돕기 위해 유스띠노 神學校의 내력을 간단히 말씀 드릴까 한다. 1911년 朝鮮代牧區는 京城과 大邱로 분할되고 풀로리안 드망쥬 主敎님이 大邱 代牧區監牧으로 부임하신지 3년후인 1914년 9월에 開校해서1945년 4월에 廢校되기까지 31년간 60명의 성직자를 배출한 신학교였다. 전하는 바로는 匿名의 人士가 神學校의 名稱을「성유스띠노 신학교」라고 命名한다는 조건 하에 학교 建立基金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의 뜻을 따라 「성유스띠노 신학교」라 命名했다. 그러면 유스띠노 聖人 열품도 문에도 나오지 않고 使徒도문에도 나오시지 않는 성인인 까닭에 독자들에게는 낯선분이겠기에 여기서 잠깐 소개할까 한다.

기록에 의하면 유스띠노 성인은 희랍系 브리스꼬라는 분의 아들로서 팔레스띠나에서 태어나 여러가지 學門을 섭렵하시고 成人이 되시자 眞理 탐구에 더욱 熱을 올려 學者들의 모임인 여러 學會에도 加入하셔서 활약하신바 크셨으나 當代에 성행하던 지혜나 지식은 오류가 많고 허망한 것이어서 고민 하시던 중 점잖게 생긴 한 老人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敎 信仰敎理에 接하게 되었다. 晝夜성경책이 손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 몰두했고 거기서 眞理를 터득 해서 교리 해석서와 護敎論을 펴내시는데 전념하셨다.

그러나 그 때는 온갖 것을 神이란 이름으로 끌어 모아 그때 그때 입맛 내키는대로 섬기던 로마 時代 였으나 유독 그리스도교만은 主님이 미리 예고 해두신대로 禁忌되어 박해받던 때인지라 그의 主張이 論理에 닿으면 닿을 수록 믿는 이들에게는 격려가 되었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시기와 反撥을 촉발 시키게 되어 마침내 官憲에 고발 되었고 포 투옥돼 그들 앞에서 격렬한 討論이 벌어 졌을 때 그리스도를 옹호, 그가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시다가 邪神앞에 향피워 올리기를 거절하신 나머지 斬首致命하신 분이시다.

神學校 건립 기금을 회사 하신 분이 왜「유스띠노 神學校」라 命名 할 것을 고집했는지는 그 분 만이 알일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성유스띠노 신학교」라는 명칭이 걸 맞는 것이었다

무릇 신학교의 이름을 지음에 있어 먼저 留意할 것은 거기서 공부하는 분들이 지녀야 할 理想을 일깨워주는 명칭이 되어야 하겠는데 그時代에 신학생들에게 가장 요구 되는 것은 첫째 유스띠노 성인처럼 그리스도교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철두 철미한 신앙이 요구 되던 時代였고 둘째는 비록 저명한 大學者는 아닐 망정 전교 신부로서의 합당한 지식과 덕행은 꼭 가져야하겠는 이 조건을 가잔 적절히 갖추신 분이 유스띠노 성인이라면 그 분을 주보로 모시고 그 분의 이름을 딴 神學校가 건립된 것이 지당 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성 유스띠노 신학교」라 命名함은 格에 맞는 것이엇다.

(계속)

박상태 신부ㆍ대구 비산동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