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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미 수교 100년 가톨릭 주역들] 5. 서 요셉 신부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6-27 제 1311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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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미ㆍ중 드나들며 구라사업에 헌신
곳곳에 나환자 병원ㆍ정착촌 설립
 나병예방ㆍ퇴치등 관심 환기시켜
시신을 비료삼아서까지 모든 것 바친「한국 나환자의 아버지」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을 이곳 라자로 골짜기에 묻어다오. 그리고 내 무덤 위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다오. 내 시체는 그 나무들의 비료가 될 것이고 그 나무들을 위해 집을 지어다오. 그리고 다시 두그루의 나무들 내 무덤위에 심어다오』

「한국의 다미안」, 「한국 나환자의 아버지」서 요셉 신부가 지난 66년 서거 몇 주일전 안양 라자로마을 골짜기의 숲 속 움막 숙소에서 투병중 병문안은 김창석 신부에게 말한 이아기이다.

시신을 비료로 삼아서까지 나환자들이 도우려했던 서 요셉 신부의 일생은 그야말로 나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성자의 생애」였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본국(미국)에서 일평생을 구라 사업에 헌신한 서 요셉 신부는 그 중에서 한국과 한국의 나환자들을 가장 사랑하여 와병 중에 교회장상들이 본국으로 귀국하길 권했으나 굳이 사양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활동지였던 자로동산에 시신으로 한국 구라 사업을 독려 하고 있다.

서 요셉 신부의 원명은 Joseph A. Sweeneydlek 그냥「스위니」신부로도 많이 불린다.

1895년 9월 4일 미국 코네티컷州「뉴브리테인」에서 출생한 서 신부는 1920년 2월 8일 사제로 서품, 이듬해인 1921년 메리놀회 선교사로 파견된 첫임지는 중국이었다.

중국 광동성에서 선교와 자선 사업으로 3년간 선교사로서의 역량을 쌓은 서 신부는 1924년에 임지를 한국으로 옮겨 왔다.

서 신부는 내 한하여 평안북도 신의주 근교에서 선교 및 자선 사업으로 한국 복음화에 뛰어 들어 의욕적을 활동을 전개 했으나 1927년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둥지를 펴보지도 못한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관동성에서 나병원을 설립하는 등 구라 사업에 전념 하였다.

1932년에는 미국 하와이 주로 건너가 구라사업을 전개하기도한 서 신부는 1년만인 1938년 다시 중국 광동성으로 건너가 구라 사업에 종사했다.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에 미군 군종 신부로 종군 하느라 다시 중국을 떠났던 서 신부는 이들해인 1945년 네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다시 중국 광동성에서 구라 사업을 계속하다가 1953년 미국으로 돌아와 역시 구라사업에 참여했다.

중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 드나들면서 펼쳐온 그의 구라 사업에 대한 불타는 열정과 집념은 세계 구라 사업자들에게 알려져 1954년 세계의 구라 사업가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다미안 돈턴」상을 수상했다.

1955년 두 번째로 한국에 온 서 신부의 임무는 역시 구라 사업 이었다.

재차 내한한 서 신부는 즉시 가톨릭회를 설립, 나병 퇴치 사업에 새로운 전환 그들 이룩하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당시 한국에서의 나병에 관한 관리는 환자의 격리 보호에만 급급하여 환자 발견이 어려운 것은 물론 재가 (在家)환자들에 대해 의료 혜택을 베풀래야 베풀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은 오히려 서 신부에게 의욕을 불러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안양(라자로마을)강경 포항 밀양 고성 옥천 등에 의래 진료소를 설치하는 동시 한국에서는 최초로 나환자 이동 진료반을 조직, 이미 설치돼 있는 의래 진료소를 전진기지로 삼아 울릉도ㆍ거제도등 도서 지방을 포함하여 전국을 누비며 나환자의 진료와 구호에 헌신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신환자 발견이라는 성과를 올릴 수가 있어 환자 조기 발견에 따른 조기 치료로 나병 예방과 퇴치해 절대적으로 공헌 했다.

허름한 옷차림과 움막에 거처 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한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교회내 성직자ㆍ수도자는 물론 사회 각계 각층에 구라 사업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며 중요성을 인식 시켰다.

한국에 재차 내한 하여 10여 년간 활동 하다가 이 땅에 묻힌 그는 1만 5천명에 달하는 나환자들에게 치료와 구호의 혜택을 주었고 수많은 나환자 자녀들에게 치료와 예방 조치를 취해 주었다.

그가 설립한 포항 옥천 고성 등지의 의래 진료소는 종합 병원의 근간이 되었으며 성주 문경 산청등 많은 나환자 정착촌을 직접 물색하여 설립하는 등 한국가톨릭 구라 사업의 선구자임은 물론 이나라 나병 관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데 절대적으로 공헌 했다.

서 신부는 우리나라 국민 보건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1961년 보사부장관 감사장을 비롯 1962년에는 대한의학 협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됐다.

1968년 11월 27일 노환으로 별세한 서 신부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나환자들과 함께 라자로 동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