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루르드」성체대회 한국 대표단 성지순례기 - 순례 2만리] 19. 까타꼼바

입력일 2011-05-16 수정일 2011-05-16 발행일 1982-06-13 제 1309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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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교회 크리스찬 공동체墓地
거미줄처럼 얽힌 땅굴…벽에는 직사각형 구멍들
17C마구잡이 발굴로 황폐화…삐오9세 때 재복구
「로마」시 주변에는 수많은 까타꼼바가 산재해 있다.

「까타꼼바」란 원래 2세기 중엽부터 5세기초까지 모마지역 크리스찬 공동체의 묘지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 지상(地上)의 삶을 마친 사자(死者)들이 새로운 천상 삶을 기다리는 일시적 휴식의 장소로 생각돼 온 이 까타꼼바는 또한 초기 교회 신자들이 모진 박애와 탄압의 손길을 피해 서로의 굳센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과 부활에의 확신을 다져나갔던 신앙의 道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의 손길이 사라 지고 지하 동굴 매장 풍습이 없어 지자 5세기부터 까타 꼼바는 묘지와 신앙 비밀 집회 장소로부터 오직 신자들의 순례 장소로 변모 되기 시작 했다. 이 때부터 까타꼼바 주변에는 교회가 세워 지기 시작 했고 이미 있던 교회는 그 규모를 확장해 나갔다. 또 지하 동굴에는 지상과 바로 연결되는 계단이 다듬어지고 조명 시설도 갖추게 됐다.

그러나 8세기 말엽부터 순교자의 유해와 유물들을 교황청 구내에 안치하기 시작하자 순교자 묘소를 참배하기 위한 순례자들의 발길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멀지 않아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까타꼼바에 세워진 지상의 교회도 점차 허물어져 갔고 동굴 입구는 잡초와 돌더미에 묻혀 갔다.

대부분의 까타 꼼바는 이렇게 해서 후손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단지「로마」동쪽 아삐아街에 있는 산ㆍ세바스티아노 부근의 몇 몇 동굴만이 중세기 까지도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어 지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17세기에 들어「로마」지하 세계의 콜롬버스로 불리우는 안또니오 보시오가 잊혀진 까타꼼바 발굴에 착수, 30여개의 잊혀진 지하 묘지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지하 동굴 유물들을 교회와 박물관으로 닥치는대로 옮겨감으로써 까타꼼바는 점차 황폐화 되기 시작 했다.

19세기에 들어 교황 삐오 9세가 교황청 내에 공식 기구를 창설, 까타꼼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보존 작업을 추진 하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초기 교회 신자들의 신앙의 얼이 구석 구석 새겨진 이들 까타꼼바는 더 이상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늘날「로마」시 주변의 수많은 까타 꼼바는 교황청ㆍ이태리 정부 간의 약정에 의해 교황청에서 그 관리를 맡고 있다. 크리스찬사회에서 가장 공경 받는 장소의 하나로 되어 있는 이 까타꼼바의 보존과 감독을 위해 교황청은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다.

한국 순례단은 야누스門에서 시작 되는 옛 로마의 군사 도로였던 아뼈아街를 달려 로마시 동쪽의 까타꼼바를 찾았다.

무작정 파헤쳐 온갖 유물들을 옮겨 가던 때와는 달리 오늘날의 까타꼼바는 그 보존을 위해 각계에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 할 수 있었다. 급경사를 이루는 계단 입구에 크게 붙여 놓은 사진 촬영 그지 표지판만 보아도 순교자들의 넔이 깃들고 초기교회 신자들의 신앙의 얼이 새겨진 이곳을 성역으로 가꾸려는「바티깐」당국의 의지를 엿 볼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여름인데도 동굴안은 서늘한 냉기가 엄습해왔다. 비록 1700여년전의 묘지이긴 하지만 깜깜한 지하동굴 무덤 속은 낯선 방문객의 머리 칼을 쭈뼛 쭈뼛하게 만든다.

높이 2 ~ 3미터, 폭 1m정도의 당굴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지하동굴 벽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들이 파져있다. 이 곳이 바로 死者의 시신을 안치했던 곳이다. 사체를 이 곳에 넣어 입구를 타일이나 대리석 조각으로 밀봉해 놓았던 것인데 지금은 밀봉 시설들이 모두 헐리어 그 안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돼있다.

원래 로마 인근 지역은 화산 지대로서 지하는 화산암으로 구성 돼 있다. 이 화산암은 쉽게 파낼 수는 있지만 흙보다 단단하여 무너져내리는 일이 없다.

까타꼼바는 바로 이러한 지층(地層)의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진 무덤이다.

붉은 색을 띤 지하 묘소에는 사체가 놓였던 부분만이 시신이 썩어 검붉은 한줌의 흙으로 변해있고 가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유골이 놓여 있기도 했다.

사자의 날카로운 잇빨 앞에서도 끝내 신앙을 증거하고 간 순교자의 시신이 후손들의 흔들리는 신앙 자세를 원망이라도 하듯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번쩍이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동굴에서 자칫 영원한 지하 미아가 되기도 한다는 굴속을 조심스레 벗어 나왔다.

밝은 햇살이 눈을 부시게 한다. 오늘날 이처럼 곰팡이 냄새 나는 지하 동굴로 숨어 들지 않고 이 밝은 태양 아래서 떳떳이 이 신앙을 간직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잠든 수많은 영혼들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해 온 결과가 아닐까.

이 곳에서 순교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한 순례단은 다음 방문지를 향해 갈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