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회 문화재 순방] 5. 사적288호 전주 전동성당

입력일 2011-05-09 수정일 2011-05-09 발행일 1981-12-20 제 1285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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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가톨릭의 얼굴이며 희망의 등대
완만한 곡선의 우아함과 화려함은 추종부허
호남의 성지이자 풍남문의 문턱에 위치
금년 9월 25일자로 대구주교좌 계산동성당과 인천주교좌 답동성당과 함께 사적 제 288호로 지정된 전주 전동성당은 전주 가톨릭신앙의 표본이며 동시에 오늘날 전주시내 7개 본당을 탄생시킨 어머니교회이기도하다.

전주시 천동 1가 200~1번지에 위치해있는 전동성당은 전주지역에 가톨릭의 씨를 뿌리고 풍성히 열매 맺게 하는 밑거름 역을 다해오면서 교회의 쉼 없는 성장을 재촉하고 있다.

진동성당은 1908년 5월 5일 착공, 6년 후인 1914년에 준공됐으며 헌당식은 1915년 8월 24일 당시 대구교구장 플로리아노안 주교 주례로 거행됐다. 이미 이 성당에 건립 되기전 전라북도에는 되재(1894년) 나바위(1906년)수류(1907년)등 3개 성당이 있었으나 모두가 전주읍내와는 멀리 덜어진 지역들이었다.

전동성당의 건립은 1889년 완주군소양면 대성동에 처음으로 정착, 전교를 시작한 윤 보드네(약실) 신부가 2년 뒤인 1891년 전주읍내로 나와 본격적이 사목 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계획되기 시작했다. 전주로 나온 윤 신부는 전동에 있던 구례집을 매임, 여기서 기거하면서 전교에 나섰다. 당시 전주에는 천주교신자가 한집 뿐 이었다.

당시는 의화단사건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할 뿐 아니라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 등이 많을 때로 전교는 상상외로 잘됐다. 어떤 해는 한해에 수백명이 영세하기도해 지금까지 성당으로 사용해오던 구례집은 신자들이 다 들어설 수가 없어 성당건립이 시급해졌다.

1909년 전주시내 신자는 8백 91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 신부는 1908년 빅톨포이스넬 신부에 성당 설계를 부탁하는 한편 이미 전동에 매입해둔 4천평의 대지위에 그해 5월 5일 성당기공식을 가졌다. 윤 신부와 신자들은 성전건립을 위해 모금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신자들은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성당건물은 석재와 벽돌로 건축키로 하고 석재는 황등에서 말로 실어 날랐으며 벽돌은 중국인들이 동원돼 그 자리서 찍어 구워냈다. 이처럼 윤 신부와 신자들이 하나로 뭉쳐 성당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윤 신부가 성당건립을 위해 벽장 속에 감추어 두었던 돈을 몽땅 도둑 맞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공사는 2년간 중단됐다. 그동안 윤 신부는 공사비를 마련하기위해 생활비를 최저로 줄이고 생활필수품 마저도 구입하지 않으면서 온갖 고생을 참아 견디며 공사가 재개된 날을 기다렸다. 2년 후 다시 시작된 성당건립공사에는 멀리 전남 장성 신자들까지 도시락을 준비해와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건물은 1914년 준공을 보았다. 그러나 윤 신부는 자신의 필생의 집념으로 이룩한 이 전동성당이 하느님의 성전으로 축성되는 헌당식은 끝내 지켜보지 못한채 1915년 5월 27일 57세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헌당식은 약 3개월 후인 8월 24일 거행됐다. 본당주보는 윤 신부의 수호성인이었던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로 모셨다.

무엇보다도 전동성당은 건축양식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답기로는 명동성당을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붕과 종각이 둥글고 석조 기둥들도 둥글게 만들어졌다. 성당내부는 높으면서도 둥글게 돼있고 여기에다 적색과 흑색의 벽돌이 조화돼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우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또 2층 성가대의 좌우는 긴 복도식으로 돼있어 부활이나 성탄 때처럼 신자가 많을 때는 그 위에서 미사참예를 할 수 있도록 돼있다.

성당의 크기는 건평이 1백 89평으로 명동 대성당의 3분의1정도이며 약 5백명이 의자에 앉아 미사를 참예할 수 있다.

원래 성당바닥은 나무로 돼있었는데 1973년 11월 제대부분만 제외하고 바닥전체를 시멘트로 대체시켰다. 목재로 만든 제대는 원형을 그대로 두고 신자들과 마주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제대를 따로 설치했다.

그리고 1975년 성당건립 60주년을 맞아 그전부터 사용해오던 나무의자를 갈고 약 4개월에 걸쳐 퇴색된 유리창을 교체하고 내외부를 채색하는 등 본당 전신자가 성당보수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벼락으로 종탑이 약간 금이가 피뢰침을 가설하기도 했다.

전동성당이 오늘날 그 자리에 터를 잡게 된데는 두 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성당터가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 불리는 풍남문(豊南門 혹은 남문)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이 문을 통과하는 모든 이에게 가톨릭을 과시하기 위함 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이 풍남문 밖에서 윤지충ㆍ권상연ㆍ유항검 형제 등 호남의 순교자들이 순교한 성지라고 한다.

호남제일문의 문턱에서 순교선열들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오늘도 변함없이 호남전역에 가톨릭을 설파하고 있는 정동성당-아마도 전동성당은 호남가톨릭의 내일을 비취주는 희망의 등대로서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