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교회 문화재 순방] 3. 사적258호 명동성당

입력일 2011-05-09 수정일 2011-05-09 발행일 1981-12-06 제 1283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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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능가하는 성당없어-선교사들 혜안 놀라와 
첫 전교중심지에 건립 한국복음화의 초석 다져
박해 극복한 한국교회「승리의 상징」
명동성당、사적 제258호-. 「1892년(고종29년) 8월 5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8년 5월 29일 완공됐다. 건평 4백45평의 이 건물은 프랑스인 꽈스트 신부가 설계한 것으로 종탑높이 45m 건물길이 69m、폭 28m、지붕높이 23m로 지붕은 동판이고、건물구조는 삼랑식의 고딕식 양식이다. 주교관은 성당보다 더 빨리 1890년에 세워졌는데 벽돌 2층 건물로 연건평 1백 99평이고 발코니가 있으며、후에 개조 또는 첨부한 부분이 있다. 黃玹이 지은 梅泉野錄에는 벽돌을 쌓는 일은 중국에서 데려온 벽돌공과 미장이에 의존하였으나 벽돌은 용산공장에서 20여 종의 모형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명동(舊名ㆍ종현) 성당 정문을 들어서기전 오른편에 세워진 사적안내문은 이같이 명동성당의 유래를 간략하게 기슬하고 있다.

그러나 명동성당이 완공된지 80여 년이 넘었으나 아직 한국에서 규모나 예술적인 면에서「명동」을 능가하는 성당이 없다는 것만 보아도 당시 명동성당건립이 얼마나 힘든 역사(役事) 였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명동성당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 무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국 교회사에 있어 무수한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한국천주교의 얼굴이며 박해와 발전의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명동성당은 한국인 첫순교자 김범우가 살던 집터에 세워진 것으로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귀국하여 바로 여기서 전교사업을 시작한 한국교회 최초의 전교 중심지였다.

이같이 한국교회 전교지의 중심에 주교좌 대성당과 주교관을 마련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혜안은 적어도 1백년 이상을 앞서 내다본 것이다.

명동성당 건립은 1892년에야 착공되었으나 그 준비작업은 10년을 앞서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가 종식되고 신교의 자유를 얻게되자 1886년 한불 수호조약 비준 수년전에 이미 종현의 넓고 높은땅을 매입、한국교회 복음화의 초석을 다져 놓았다.

한불 수호조약이 비준되자 이듬해인 1887년부터 종현의 산 등을 깍아내는 정지작업이 시작됐다. 3년 간에 걸친 정지작업은 신자2명과 비신자2명 등 4명이 희생될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

당시 성당건립계획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곳이 왕궁을 비롯 서울 장안을 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반대가 심하였으나 교구장 백 주교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건립허가를 얻어 성당건립에 앞서 1890년 2월 2일 주교관을 착공、주교관은 이해에 완공 축성됐다. 이 주교관은 현재 사회복지회관과 사도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제작년까지 주교관과 가톨릭 출판사옥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이건물은 용산 신학교와 약현 성당보다 먼저 건립된 역사깊은 건물이지만 명동성당 사적문 일부에 간략이 소개돼있을 뿐이다.

1892년 8월 5일 정초식을 거행한 종현대 성당은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6년만인 1898년 5월 29일 완공、무염시태 성모마리아를 주보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 장엄성대한 축성식에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조선정부의 고관을 비롯 외국 사신들과 전국에서 수만명의 교우가 참석、박해를 딛고 일어선 교회의「승리의 상징」이기도한 명동성당의 웅장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성당은 건축되는 동안 서울 장안의 화제거리로 등장、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며『대체 사람들이 무슨 집을 이렇게 크게 지으며 들보를 얹을 수 없으니까 벽만 자꾸 쌓아올려 가는구나』하는 등의 우스운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중앙 제단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의 성 베네딕또의 석상과 제단은 공사의 무사한 완공율 위해 베네딕또 성인에게 특별히 요청하였기 때문에 설치 되었으며、왼쪽의 예수성심제단은「빠리」외방전교회 주보이다.

예수성심제단 옆쪽의 복자제대와 복자상본은 1925년 79위순교복자 시복식기념으로 마련된 것이며 파이프오르간은 1927년 교구장 민주교의 사제서품 금경축 기념으로 설치했다.

영성제 난간은 원래 철책으로 돼었으나 태평양 전쟁때 징발 당해 나무로 대체되었다. 1947년에는 한국신자들의 헌금으로 1백여만 원을 들여 성당을 수리하면서 종각에 피뢰침을 달기도 했다.

이후 지난 72년 교구차원의 명동대성당 보존위원회를 구성、73년 11월 대대적인 복원수리를 마쳤다.

또한 지난해에는 2백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창문 스테인드글래스 복원공사에 착수、84년 완공예정으로 있다. 좌석 수용인원 1천 5백명、입석까지 2천 3백명을 일시에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성당이기도 하다.

「한국 가톨릭의 상징」으로 명동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명동대성당은 앞으로 언젠가 보다 더 큰 대성전이 건립되더라도 그 위치는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