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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문화재 순방] 2. 사적255호 용산신학교와 성당

입력일 2011-05-09 수정일 2011-05-09 발행일 1981-11-29 제 1282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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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현재는 성심학원으로 사용
신교자유 이후 한국복음화의 전초기지
별개건물이나 동일호수로 사적지정돼
사적 제 255호인 용산신학교(일명ㆍ예수성심신학교ㆍ現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와 이 신학교성당은 지난 76년 약현성당(사적 제252호)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됐다.

용산신학교와 신학교성당은 현재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성심여자고등학교 교정안에 함께 있어 별개인 두개의 건물이 동일한 호수의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이 두건물은 설립연대가 각각 다른 고딕식 건축양식으로 신학교는 약현 성당보다 빠른 1891년 완공 축성되었으며 성당은 1899년에 착공、1902에 완공됐다.

특히 용산신학교는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육 과정을 갖춘 최초의 학교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다.

약현(중림동), 종현(명동) 성당과 함께 프랑스인 꽈스트 신부에 의해 설계건축된 용산신학교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전형적인 고딕식 양옥으로 1902년 성당건물이 완공될때까지 이 건물안에 소성당이 있었다.

1899년 착공、1902년에 완공된 신학교성당은 신학생수가 늘면서 소성당에서의 수용이 힘들게 되자 건립한 것으로 40여 평에 불과한 아담한 성당이다.

용산신학교의 기원은 제천 배론 신학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학교 사업은 박해로 일시 중단 되었다가 1885년 5월 5일 원주부흥골(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신학교를 설립한 것이 용산신학교의 전신이다.

원주부흥골 신학교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887년 현재의 위치인 용산 함벽정(現 원효로4가) 으로 옮겨와 용산 신학교로 문을 열었다.

따라서 이곳은 「빠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불조약 체결이후 본격적인 선교 거점지역으로 활용한 선교의 전초 기지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빠리」외방전교회의 기본 방침에 따라 신교 자유이후 무엇보다 먼저 시작된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게 된 용산신학교는 1914년 대구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우리나라 유일의 성직자 양성소로서 1백여성직자 양성소로서 1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1929년까지는 소신학교 6년、대신학교 6년제로 운영돼 왔는데 노기남 대주교도 용산신학교 출신이다.

조선교구는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 이어 1881년부터 1884년까지 21명의 신학생을 페낭신학교로 유학보냈었는데 이들 21명의 신학생중 7명은 병사하고 4명은 자퇴、병지10명은 귀국하여 용산신학교에 편입、사제로 서품됐다.

이들 10명중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1896년 강성삼ㆍ강도영ㆍ정규하 등 3명이 약현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이내수ㆍ김성학ㆍ한기근(1897년)김원영ㆍ홍병철(1899년) 김문옥ㆍ김승연(1900년) 등이 차례로 그뒤를 이었다.

용산신학교는 1942년 2월 16일 일제 탄압의 일환으로 인가가 없다는 구실로 폐쇄、학생들은 일시 덕원신학교로 보내어 졌다가 현재의 혜화동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산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쇄되면서 용산 신학교성당에 안치되어 있던 김대건 신부의 유해역시 혜화동으로 옮겨졌다.

6ㆍ25때 일부 전화를 입기도한 용산신학교와 성당은 1956년 성심수녀회가 진출、이듬해부터 학교를 시작하면서 재정비、현재 신학교건물은 학교법인 성심학원과 재단법인 성심수녀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신학교성당은 학교와 수녀원 성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신교자이후 한국 복음화의 전초기지였으며 한국인성직자 양성의 요람-용산신학교는 이제 성심여고학생들의 추억이 깃드는 아름다운 교정으로 변모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