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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9. 순교와 한국사

조광ㆍ동국대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7-12 제 126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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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 지녀
교의 증언을 왕조질서 파괴로 인식-박해
우리나라의 천주교회는 교회가 창설된 이후 1백여 년 간에 걸쳐 정부당국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탄압의 와중에서 적어도 1만여 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순교를 하였다. 이다지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은 하나의 경이로운 일로 이해되고 있다.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죽은 순교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귀한 뜻은 교회사의 분야에서 큰 의미를 부여받고있다. 그런데 그들의 순교가 사회병리적 현상의 일종인 집단적 광태가 아닌 이상 그들 자신의 건전한 결단력에 의해서 단행된 순교라는 행위는 민족사의 분야에 있어서도 일정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 1만여 명의 죽음과 민족사의 관계를 좀더 고구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순교와 민족사의 관계 및 순교가 민족사에 던져주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당위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왜 순교를 하였고 무엇을 위하여 죽음을 당했는가에 관한 언급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순교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 행위였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의 방법으로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질서에 대해 도전을 감행하였다. 그들의 신앙이 前近代的 王朝秩序를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조정은 그들을 박해하였고 그들은 죽음을 당해야 했었다. 이것이 박해의 이유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강화된 이유중에 하나로는 祖上祭祀문제가 있다. 조상제사 문제는 典禮問題의 일단이었다. 전례문제는 동양문화에 대한 교리적 해석상의 차이와 선교방법에 관한 異見때문에 발생한 논쟁이었다.

즉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예수회에서는 유교의 부족함을 천주교의 교리가 보충하여 줄 수 있다는 補儒論을 전개해 나가면서 동양의 전통적인 조상제사도 용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후 중국에 진출한 몇몇 수도회에서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게 되었고, 이 문제는 예수회와 교황청의 대립으로까지 확대되어 나갔다. 교황청에서는 이에 관한 논란을 계속해 오다가 1741년 이후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다가 조상제사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은 1930년대에 와서야 이루어졌던 바 이때에 이르러 교황청은 조상제사를 다시 용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교황청에서는 조상제사에 관한 종전의 결정은 敎義的 판단이 아닌 紀律的 문제임을 밝혀 주었다. 또한 조상제사를 용인한다는 최종적인 결정을 통하여 지난날 이에 대한 거부를 명했던 것은 동양문화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였음을 간접적으로 나마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도입될 당시 교회는 조상제를 거부하도록 가르쳐 왔다. 그리하여 신도들은 이 가르침을 따랐고, 이러한 신도들의 행위는 정부 당국자들에게 박해의 좋은 명분을 제시해 준 결과가 되었다. 그런데 신도들이 조상제사를 거부한 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의미 이외에도 조상에 대한 제사로 상징되는 전통적 신념체계에 대한 거부였다는 측면이있다. 이러한 성격이 있기 때문에 조상제사에 대한 그들의 거부행위는 가치를 갖는 바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순교자의 죽음이 조상제사라는「紀律的」문제 때문에 촉진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율적 문제와 관련된 신학적 판단의 미숙성 때문에 신도들의 죽음이 촉진되었다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소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들은 잘못된 신학의 피해자이기도 하였다.

순교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뜻은 證言이라 하였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천주교의 敎義를 증언하기 위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은敎義처럼 인식되던 紀律을 증언하기 위해서도 죽음을 당하였다. 또한 그들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여 이땅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노력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볼 때 그들의 순교는 역사 발전의 도정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이와 같은 여러가지의 복합적 원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이敎義에 대하여 증언하려했던 숭고한 행위의 종교적 의미는 교회사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사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서도 의미를 갖는 행위였다 자신의 신념을위해 죽을 수 있었던 무수한 사람들의 존재는 민족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긍지를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형성을 위해서도 죽음을 당하였다. 前近代的인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 보려던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민족사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 역사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순교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촉구되고 있다. 그리고 순교에 대한 현양은 공허한 말장난에 그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지난날의 순교자처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과 실천을 수반하는 현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상의 영광을 도둑질 하고 그들의 뼈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계속>

조광ㆍ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