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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8. 민족운동 그리고 천주교회

조광ㆍ동국대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6-28 제 126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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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에 평신도들이 앞장
교회도 평신도의 민족운동 적극 지원
안중근 의거ㆍ국채보상 운동은 대표적
우리나라의 역사는 18세기말엽부터 前近代社會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어 가던 과도기에 놓여있었다. 이 과도기를 지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에게는 극복해야 될 두개의 과제가 있었다. 그 첫번째의 과제는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면 封建主義의 극복이었다. 그리고 다음의 과제로는 자주적 근대화와 민족의 생존권을 말살시키려던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여기에서 근대화와 노력은 反封建運動과 反侵略運動의 양면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족운동도 이 두가지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에서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植民地化를 막아 민족의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길은 반봉건운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반봉건운동은 특권적 압제자로 새롭게 등장한植民母國에 대한 반침략 운동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는것이었다.

우리나라의 近代史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反侵略的 민족운동의 추진에 천주교회도 일정한 기여를하고 있었다. 이반침략적 민족운동은 근대정신의 보급과 근대사회의 형성을 위한 반봉건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반봉건 운동이 외세의 침략에 대한 간접적 저항이었다면, 반침략운동은 이에 대한 직접적 저항을 말하는 것이다.

천주교회가 반침략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때는 1904년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국토를 침탈하기 위한 계책으로 황무지 개간을 구실로하여 일본인의 이주와 국토의 점탈을 꾀하였다. 이때 조선의 천주 교도들은 명동성당에 모여 황무지 개간령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일제에 대한 반침략운동은 이 기도회로 촉진되고 있었다.

또한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전국에서 義兵戰爭이 발발하였을때 이에 참여한 천주교 신도들의 투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들면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金尙台를 들 수 있다. 그는 일본군에게 잡히어 사살될때까지 묵주를 몸에지니고 국권의 회복을 위해 분투했던 것이다. 그는 의병전쟁에의 투신을 통하여 반침략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투쟁의 과정에서 산화한「하느님의 백성」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에 전개된 반침략운동 가운데 安重根의의거와 國價報償運動은 민족운동의 발전에 끼친 천주교회의 영향력을 대변해준다. 안중근은 만주의「하르빈」에서 조선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오히로부미를 응징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또우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십자성호를 긋고 나서 大韓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그의 행동에서 애국심과 신앙심의 조화를 볼 수 있다. 이 의거를 단행하기 이전 그는 진남포 성당의 발전과 교회학교의 운영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반침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무장투쟁이었다. 이에 대하여 국채보상운동은 온건한 방향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으로부터 國價 1천 3백만원을 차관하게 되었다. 이 차관이 일본의 침략을 더욱 촉진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므로 전국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이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徐相敦은 대구 지방의 대표적인 평신도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전체 교회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으며, 당시 교회에서 간행하던 京鄕新聞을 통해 이 결과가 소속 보도되었다. 경향신문과 교회를 통한 국채보상운동은 한일합방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런데 서상돈의 제안이 대한 매일신보 등 중앙의 언론기관에까지 호응을 얻게 된 데에는 교회신문인 경향신문의 중개역할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일합방이 강행된 후에도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계속되었다. 합방직후에는 安岳事件이 일어났다. 이것은 평신도 安明根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된 사건이었다. 또한 105인 사건에도 李基塘과 같은 천주교 신도가 가담되어 있었다. 또한 1919년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3ㆍ1운동에서도 서울안성ㆍ수원, 그리고 평양ㆍ해주 및 대구 등지에서 다수의 신도들이 참여하고 있다.

3ㆍ1운동 직후에는 간도지방에서 천주교 신도들이 주체가 되어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義民團이 결성되었다. 의민단은 方雨龍에 의해서 지휘되고 있었으며, 국내의 進攻을 기도하던 강경한 단체였다. 이 의민단은 그 무장규모와 병력의 수에 있어서 洪範團의 독립군과 대등한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간도지방의 독립군 단체중 뚜렷한 존재였다. 그리고「上海」의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安恭根이나郭然盛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와같은 평신도의 활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의 발전에 이바지한 교회의 일정한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사의 발전에 끼친 이러한 교회의 역할을 통하여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가 추출되어지는 바이다.

조광ㆍ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