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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설정 150주 기념 문학강연초] 5. 허무의식과 문학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6-14 제 1259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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歪曲ㆍ변형과정서 人間救援문제 등한시
자신의 利已서벗어나 浮游하는 정신개방의 허무의식으로 생명가치찾아야
虛無意識은 인간구원 세계의 활력소
고도로 전문화ㆍ분업화ㆍ비인간화 되어가고 있는 현대에 접어들면서 문학은 무수히 왜곡ㆍ변형되어 그진실된 모습을 상실해가고 있다. 곁으로 보기엔 다양하고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늘의 문학은 사실상 문화의 본질적인 질문부터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문학 자체의 필연성마저 위협받을 위기에 놓여있다. 그 본질적인질문이란 바로 「문학은 왜 하는가」하는 것이다.

문학은 그것이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매체로서 사용되었든, 어떤 집단의 승리를 노래하기 위한 것이었든 간에 애초부터 「인간의구원」이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우리는 상기해 볼 필요가있다. 이 본질적인 테마는시대를 거쳐 오면서 점차「구원」을 해야한 그 구체적인 방법인「표현」의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표현의 문제는 더욱 문학의 최전선에서 문학을 이끄는 동인(動因)이 되어 문학의 지상목표처럼 착각되기에 이르렀다.

오늘의 문학은 문학이라는거대한 틀속에「표현」이라는 수단이 포함되는것이 아니라 문학이 반대로 그속에 축소변질되어 포함돼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의 문학은 더이상「인간의 구원」이라는 거창하게 보이는 문제와는 별로 관련없이 된 것이다.

이와함께 문학의 범위를 축소시킨 또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다시말하면 문학이 결국엔「삶의 자기표현의 한형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할때 이「자기」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짓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이「자기」라는것을 폐쇄적인 방법으로 수용한 문학인들 (특히서구의 문학과 그문학의 정신분석학적 요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문학인들)과 개방적인 방법으로 수용한 문학인들(우리의 현실에서 이들은 소수에 속하겠지만)의 무그룹으로 문학인들의 경향을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개방적인 밥법이란 역사ㆍ현실ㆍ사회적인 밥법이란 역사ㆍ현실ㆍ사회적 제조건들을 「자기」혹은「자아」라는 존재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로 받아들이고, 이 조건적 요소들에 구속ㆍ억압되어 있는「자기」를 보다 바람직한 인간상태로 진전시키려는 문학정신을 가지게 된다. 이에 반해 페쇄적 방법을 차용하는 문학은「자기」를 긍극적으로는 이와같은 조건적 요소들과 무관하게 순수한 개채로서 성립될 수 있는「절대자아」로, 세계는 그런「절대자아」들의 연속적인 복합체로 파악하여 문학적 기교ㆍ표현방법ㆍ무의미적 긴장ㆍ미적 가치 등을 인간상태의 진전보다 더높은 위치에 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 두개의 문학적 방법이 어떤 문학정신을 표방하든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인간의 구원」-좀더 자세히 말하면 구원을 향한 인간의 자기표현이라는 것이며,이 본질적인 테마로부터 회피된 문학은 진정한 문학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근본적인 질문의 의문호를 듣고 문학이라는 대지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중의 하나이다.

내가 문학을 시작하던 시기에 이런「인간구원」의 한방법으로 그 무엇보다 내의식을 강렬로 그 무엇보다 내의식을 강렬하게 점령한것은 「허무」였다.

허무의 순수의지로써 성취될 수 있는 어떤절대의 세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보이는 일상적인 삶의 모든것은 일시에 정련(精鍊)시켜버리고 우리를 최후로 해방에 이르게할 수 있는 세계, 나는 그런 세계를 매일 꿈꾸었고 나의 시로써 성취해 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성취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저항을 수반한 「비극적 인식」이 요구된다고 믿었다. 비극적 인식이야말로 사물과 인간 그리고 이를 포함하는 삶자체를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적 구원」의 방법이었다.

가령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하루해가 다지고 난 다음 각자 자신의 잠자리로 돌아갈때의 해방된 정신, 붙어있던 살들은 다썩어 없어지고 흰뼈처럼 저흔자 빛날수 있는 외롭고 투명한 정신, 나의 허무의식은 그런 정신들에 대한 강한 집착이었다. 무가치한 삶의 모든 일상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그러한 한계계로 부터의 부단한 도약으로서의, 자유에의 저항의지가 항상 그 존재를 지탱시켜 주고있는 허무의식.

그 의식은 그러므로 허무에 대한 일반적 고정관념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利已와 욕망으로 부터 벗어나 부단히 浮遊하는 정신의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그 위기은 개인속의 무가치성, 사회속의 모든 불의 부자유에 저함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문학적 의미로 받아들이게 한다.

동시에 그러한 의식으로서 의「허무」는 결국 인간적인것 생명적인 것의 가치를 갖아내고 그것을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수반하게하면 그 의식을 통해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구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하는 사랑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적인 가치란 자유ㆍ정의ㆍ평화와 같은 인간들을 언제나 인간이 모든 가치를 말하는 것이며, 생명적인 것이란 삶의 힘을 갖고 있는 모든것, 건강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요소를 포용할 수 있는 「자기」란 보다 개방적인「자기」, 역사또는 사회의 모든 조건들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살아있는 인간인「자기」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인식」속에서는 죽음도 그 종말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생명에의 창조라는 사랑의 연대의식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허무주의자는 결코 염세주의자가 아니며, 세상을 비관하고 세상의 모든 가치를 절망적으로 부정하는 낙오자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해 진정한 깨달음을 지닌 자이며 그 깨달음을 생활하는 자이다.

실로 허무주의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모든 요소에의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며, 그 비인간적인 요소에 대한 끊임없는 비타협적 저항정신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궁극적 목표는 절대 순수의 인간주의이며, 생명주의가 되는 것이다.

문학은 이 비인간적인 현대에서 가장 비 현대적인 인간의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浮遊하는 정신의 자유로써 인간들은 자기 삶의 가치를 허무의 순수개념으로 쌓아올려야하며 그 놀겨의 일환으로 아마도 나의 문학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