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7. 새로운 정치구조와 법에 대한 인식

조광ㆍ동국대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6-14 제 1259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평등의식과함께 양심법  優位性인식
自然法사상보급ㆍ法의 大衆化에 앞장
새정치체제에 대한 展望제시
조선 왕조의 전통적인 지배 체제는 王政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王政은 身分制的 질서를 기본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즉 王이나 양반ㆍ귀족이 민중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근거는 신분제적 질서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지배의 합법성이 혈연이나 신분에서 구해지고 있던 당시 평등을 역설하는 천주교의 교리는 당시 사회의 근본구조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은 정치 체제에 대한 부정으로 직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천주교 서적에서는 교황제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었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선거의 방법을 통한 교황제도의 존재가 지배충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교황제도의 존재는 지배자를 선거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정치 행위에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배자의 「선출」이라는 문제가 조선후기에 던져준 충격의 예를 蔡淸恭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는 교황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즉 그는 말을 하기를 『그나라 풍속에는 본래 王이 없으므로 일반인 좋은 사람을 택하여 王으로 세운다하니 이는 더욱 극히 흉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때문에 천주교란 국왕도 모르는 「無君之敎」라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주교를 통한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이해를 막아 보려던 집권층의 노력과 두려움이 「無君의敎」라는 비난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교황제도를 통하여 시사된 새로운 정치체제는 집권층에게는 두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民本과 民權을 논하던 실학자에게는 새로운 정치구조에 대한 開眼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는 이에 관한 예를 茶山丁若鏞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 신자로서 초기교회사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실학자 정약용의 사상이 형성되논 과정에서 천주교는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정약용은 그의 논문 「湯諭」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 구조를 제시해 주었다. 즉 그는 혈연에 기반을 둔 세습적인 왕의 존재나 관리의 임명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天子는 추대에 의해서 선출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리들도 이에 준하여 선출될 것을 바랐다.

즉 그는 공직자들은 대중이 추대하지 않으면 그자리에 오를 수 없음을 명백히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약용의 주장은 교황제도라는 모델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천주교의 서적은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인식을 촉진시킨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전통사회에 있어서 법이란 지배자의 엄한 명령을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교회에서 역설한법은 하느님이나 자연의 高度한 질서를 인간이 구체화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법은 주로 行政法이나 刑法에속하는 것들로서 민중들은 가능한 한 이를 피해 보고자 하였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러한 법들 이외에 하느님이 질서 지워준 자연이나 마음의 법이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초기 교회사에서 등장하는 순교자 尹特忠은 조상제사를 강요하고 유교적 문화질서로의 복귀를 권하는 관리들에게 『나는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하느님께 죄짓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丁夏祥을 비롯한 그후의 순교자들도 서슴없이 하느님의 법과 명령이 사대부들의 그것보다는 더욱 중요한 것임을 밝히었다.

그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관리나 양반 사대부의 법을 따르기 보다는 하느님이 명하신 양심의 법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리고 양심법이 인간의 법보다, 우리위에 있음을 밝혀 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순교자들의 태도에서 양심법내지 자연법에 대한 관념과 이해를 그들이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박해기 신도들에게 읽혀지던 교회의 서적에도 「마음법 (良心法)」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었다. 그리고신도들이 암송해야 될「大開答」의 내용에도 이「마음법」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와같은 가르침을 통하여 자연법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으며, 자연법 사상을 보급해 나갔다.

또한 개화기 새로운 법를 체계가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 京鄕新聞과 實鍵을 통하여 교회는 일반인을 상대로한 법률계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법과 정치, 법과 윤리를 분리시켜 법의 독자성을 밝혔고 법의 대중화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화기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교회의 이러한 법률계몽 운동도 자연법에 대한 일반 신도들의 기본적인 인식을 배경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 주었으며 자연법 사상을 보급하는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법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이와같이 교회는 새로운 정치구조와 법에 대한 인식을 촉구해줌으로써 민족사의 발전에도 적지않게 기여해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도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조광ㆍ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