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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6. 근대적 교육의 촉진

조광·동국대 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5-31 제 125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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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학문의 도입에 앞장서와 
새 교육 과정도 도입ㆍ고등교육ㆍ직업교육까지 실시
교육통한 국민계몽에 지대한 공헌
조선에 천주교가 도입된 배경 가운데 하나로 우리는 당시의 학자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이승훈이 서양의 수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이를 배우려 했던 점은 바로 이와같은 당시의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회는그도입 초기부터 서양의 학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에서 교육의 근대화를 성취하고자 하던 노력은 서구라파의 학문을 도입하려던 것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천주교회는 근대적 학문의 도입에 앞장을 섰고, 이를 보급하기 위한 교육운동에 일찍부터 투신하여 왔다.

조선교구가 설정된 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조선인을 교육하여 그들을 성직자로 만드는 일과 평신도 지도자의 양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불란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 중국인 신부 劉方濟에 의해서도 시도 되었다. 그러나 성직자 양성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교구가 설정된 이후부터 였다.

그리하여 이미 1840년대부터 불런서 선교사들은 조선인 소년들을 발탁해서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그후 국내에서의 박해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哲宗시대에 선교사들은 원주 부홍골에 신학당을 열어 조선인 신학생을 교육하게 되었다. 이성직자양사업은 박해로 말미암아 중지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땅에 근대적 교육을 도입하기 위한 최초의 노력으로 평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신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은 한문이나 한글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수학 음악과 같은 과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西洋語와 神學 哲學도 교육되고 있었다. 이것은 비록 신학교육이란 특수부문에 속하는 현상이라하더라도 한국 근데교육의 시초가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교회는 그 극심한 박해의 와중에서 평신도의 교육을 위해서는 조직적인 노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도들의 교육에 전혀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므로 교회는 회장들에게 한글의 보급을 담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박해가 진행되던 때에도 일개 여신도가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교회사의 기록은 교육에 대한 교회의 관심도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있다.

신앙의 자유를 쟁취한 1880년대 이후 교회는 신학교육 뿐만아니라 일반인을 상대로한 보통교육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관심은 곧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분야로까지 그폭을 넓혀나갔다. 교회에서 세운 최초의 학교는 1884년 서울에서 개교한 韓漢學院이었다. 이韓漢學院의 개교연대는 흔히 최오의 근대적 학교로 인식되고 있는 감리교 계통의 培材學堂보다 1년을 앞서고 있다. 또한 교회에서는 1885년 원주 부홍골에 예수聖心神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교육기관에는 종래 서당을 비롯한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시행하던 것과는 달리 좀더 새로운 교육과정과 교육방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천주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의 수는 점차 많아져 갔다. 1893년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학교가 36기교에 이르렀고, 1904년에는 이숫자가 75개 교로 늘어났다. 그러나 日帝는 그 침략과정에서 조선인을 愚民化하는 정책을 강행하여 사랍학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결과로 한일합방이 단행되었던 1910년에 천주교 계통의 학교수는 46개교로 감소 되었다.

이들 학교는 대부분이 보통교육 기관이었다. 그런데 천주교회는 이미 1900년에 제물포와 서울에 여학교를 세워 여성의 교육수준을 높이고자 하였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측량학교와 농업학교등을 세워 직업교육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야학교를 세워 근로자 계층에게도 새로운 학문에 접근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한편 교회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의 분도회를 초치하여 사범학교를 설립 운영토록 하였다. 이 사범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인하여 얼마 아니가서 페쇄되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 대학과정의 사범학교를 설립했던 사실은 교육을 통한 계몽과 봉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한국사에서는 한일합방 직전의 이 시기를 애국제몽운동기로 부르고 있다. 교회에서도 이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운영했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학교의 교육내용에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國權을 수호라겨는 의지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문에 교회의 교육활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근대교육의 수행은 근대사회의 형성에 있어서 지름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천주교회는 애국계몽운동기 뿐만 아니라 한일합방과 민족해방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근대교육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사의 발전에 참여하는 교회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조광·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