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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설정 150주 기념 문학강연초] 2. 문학주제로서의 초자연적 원리

구상ㆍ시인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5-17 제 125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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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감성적 차원과 범신적 인식 지양돼야
신의 존재 무시한 시작은 감동의 공허만 유발
신에 대한 인식없이 범신세계에 빠지는 경향
외람된 말이지만 우리 詩를 읽으면서 가끔 우리시의 題材의 차원을 서글프게 여길때가 많다. 왜냐하면 시에 쓰여진 거의가 일상적인 경험이나 감각세계의 묘사에 그칠뿐 實在를 밝히려는 노력이나 형이상적 인식의 세계에는 등한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대를「존재 망각의 밤」이라고 표현했다지만 이말은 특히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하겠다. 그속에서라도 홀로 깨어 있어야할 우리 시인들마저 존재의 제일이적(第一義的)인 형이상적 물음이나 그 인식에서 비켜서 있고 잠들어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입으로는 모두 본질이다 영원이다 하면서도 실제 詩作에서는 그 본질이나 영원에는 점점 더 휘장을 쳐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시가 결코 어떤 인생의 결론이나 목적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무의식의 원천에서 직접 출현하는것』(피카소)이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이런 시가 쓰여지는 상태나 과정이 아니라 시의 구의(究意)가 철학이나 종교의 그것과 다를바 없다는 것을 밝히려 함이다.

한국에도 일부 기독교신자 시인들의 신앙적 제재나 승려시인들의 선미(禪味)가 깃든 시가 없지 않으며 그들의 수작을 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의 시들이 그 시인의 삶을 실존적 고루에서 추구되고 성취되고 달성된 경지를 보여주기 보다는 한갖 관념이나 그 사변이 갑성적 취향에 머물러 그 감동의 공허를 맛보곤 한다.

이제 20세기초 아편장이로 빈민촌을 헤매다 죽은 영국의 시인 프란시스 봄슨(1859~1907)의「하늘의 사냥기」의 일절을 음미해 보자.

나는 그로부터 도망친다.

밤이나 낮이나 오랜세월

그로부터 도망친다.

내 마음에 얽히고 설킨 미로에서

그를 피한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웃음소리가 뒤쫓는 속에

나는 그로부터 숨는다.

그러나 서둘지 않고 침착한 걸음

새로

신중하고도 위엄있게 뒤쫓는

저 발소리가 들려온다.

나를 배반한 너는 모든것에

배반당하리라-고.

(첫장 全文)

한마디로 말해 이詩는 神이 마치 사냥개처럼 달아나고 숨고 뿌리쳐도 쫓아오고 따라온다고 저주하듯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시가 영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손꼽히는 신앙시로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찬미나 그 관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종교시들과는 얼마나 다른가를 잘 나타내준 작품이라 하겠다. 이렇듯 서양시인들에게 있어 신은 이를 거부하거나 긍정하거나 그들의 존재의식의 촛점이요 외면할 바 없는 대상인 것이다. 무신론조차「神은 죽었다」(니이체)로서, 우리의 시인들처럼 신이야 있건 없건 아랑곳할바없는 무관심 상태나 공백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들은 그러한 신에대한 인식이나 물음이나 대결없이 불교적인 汎神세계에 젖어 드는것을 자주 본다.

물론 이같은 동야적 사유의 성향을 일물적으로 부정하진 않지만 우리의 이런 감선적 차원과 범심적 傾斜에서 오는 문제점을 재인식해야 한다. 이런 특색중의 예로서정주의 시편을 하나들면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내가 돌이 되면>全文

그가「국화 옆에서」를 비롯하여 귀의(歸衣)해간 범신적 세계에서 오늘에 이르는 윤희적 영교(靈交)의 경지는 이제 모든 존재의 차벼이나 우열을 완전히 해소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에 대한 무차별은 존재가 지니는 비극성의 해소이기도 하지만 한편 인간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며 그 역사성을 배제하게 된다. 또는 윤회적 영교는 존재에대한 심미정 享受를 가능케 하지만 윤리적 체험의 상실, 즉선악 가치의 不分別 상태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윤리적 고통의 바탕없는 존재의 미적享受란 관념적 유희화할 우려가 있으며 그래서 우리시의 그러한 타성적 차원의 범신적 인식은 지양돼야 할 것이다.

구상ㆍ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