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5. 한글문화의 형성촉진

조광ㆍ동국대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5-10 제 125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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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연구에 앞장 - 한글문화발전에 적극 참여
천주가사·교리서 등 한글로 저술 - 민중의 종교임을 입증
교회창립부터 한글로 지도 - 한글문화에 이바지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에 이르러 분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민중의 갈망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지배자들에게도 국가정책의 시행을 위해서는 민중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러한 두가지의 이유 때문에 한글이 만들어졌다.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 한글은 민중의 문자였다. 민중은 이로써 자신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표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글이야 말로 이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지적(知的)무기였다.

그런데 당시의 지배층에서는 민중의식의 성장을 이미하는 한글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상당한 두려움을 즈끼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양반 지배층에서는 한글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탄압도 서슴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글은 민중의노력에 의하여 번져나갔으며 한글의 발전은 민중이 주인공으로 발전으로 등장하는 근대사회의 도래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우리교회사의 총창기에 있어서 교회의 창립에 앞장섰던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도 한글로 최고의 지식인들도 한글로 천주교에 관한 가사를 지어 민중에게 이를 전하고자 하였다. 즉 1779년 丁若銓은 십계명가(十誡命歌)를 지어 십계명의 내용을 풀이해서 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李벽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지어 천주의 존재를 인식케했으며 金聖源은 경세가(警世歌)를 지어 유교적 지식에 몰두해 있던 당시인들에게 바른 도리를 선포하고자 했다. 대개 4ㆍ4조로 쓰여진 쓰여진 이한글 가사들은 민중을 상대로하여 지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만일 이가사의 작자들이 자신과같은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결코 한글로 가사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 창립이전부터 창립의 주역에의해 이와 같이 한글로 가사가 지어졌었고, 한글을 존중하던 이 전통은 교회 창립직후에 한글교리서의 등장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한글로 쓰여진 교리서가 조정에서 문제가 되기시작한때는 교회가 창립된 5년후인 1788년부터였다. 이때 충청도 일부지역에서는 집집마다 한글 교리서를 간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에 洪樂安과 같은 유학자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조정에 글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저술된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 도 순한글로 쓰여진 책이었다. 1790년대에 丁若鍾이 저술한 이책은 상편과 하편으로 되어있다. 상편은 하느님의 존재 증명, 하느님의 존재 증명, 하느님의 속성, 북교와 도교사상에 대한 비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호교론적 이론편이다. 그리고 하편에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중심으로한 구속론이 실려있다.

한글로 쓰여진 이 주교 요지는 周文謨 신부가 매우 훌륭한 교리서라고 격찬한 바 있다. 그리고 후대 의학자들도 이책이『대중을 목표로 한 가장 편의하고 설득력 있는 저술이며 아주 훌륭한 이론 전개방식이다』고 평가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일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때 관청에 압수되어 불타버린 교회서적 2백1권중에 1백28권이 한글로 쓰진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창설 직후부터 많은 교리서와 신심서들이 한글로 쓰여졌던 것이다. 특히 이때에 읽히고 있던 성경직해(聖經直解)는 성경을 한글로 옮겨보려던 노력의첫성과로 평가된다.

한글로 된 천주가사와 종교서적들은 1860년대 초반기에 가장 많은 나왔다. 이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신명초행」「천주성교공과」「성교요리문답」등 한글로 쓰여진 기도문과 신심서적, 성인전례서들을 간행하였다.

또한 1866년에 순교한 조선교구의 제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는 회장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스스로가 한글로 된 책자를 얽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도록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다.

교회는 한글의 보급을위해 노력했을 뿐만 이니라 한국어의 연구에도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즉 우리나라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의 문법구조를 근대적인학문 방법론에 입각하여 연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열한 박해 가운데서도 한국어에 관한 사전의 편찬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은 1880년 한불자전(韓佛字典)을 간행케 했으며 1881년에는 한어문전(韓語文典)의 간행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두권의 책은 한국어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인 연구서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글에 대한 이러한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개화기 韓基根 신부는 한글을 맞춤법과 보조부호의 사용에 큰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작성할 때 교회는 이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통일안이 반포된 이후 이를 즉시 받아들여 교회의 모든 출판물에 적용시키는 진취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글의 보급과 이의 연구는 우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이었다. 그 전통은 교회창설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교회 초창기에 드러나는 한글 존중의 전통은 천주교회가 그시작에서부터 억압받던 민중의 종교였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후에도 교회는 한글문화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여 주었다. 한글문화의 발전과 형성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교회는 한글문화의 형성에 기여함으로써 우리의 문화적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교회사가 한국민족사에 던져준 의미 가운데 하나로 교회가 한글문화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천대받던 한글의 참된 가치를 인식했고 이를 활용하여 교리서와 신심서들을, 그리고 가사들을 저적하였다. 이러한 실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조선의 천주교회는 한글의 가치를 공인한 최초의 집단이 되었다. (계속)

조광ㆍ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