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2. 평등사회 구현을 위한 노력

조광·동국대 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3-08 제 1245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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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평등 원리제시-평등사회 구현 앞장
박해따른 교회 희생-한국 근대화 촉진에 밑거름
신분 초월한 양반신도들, 같은「교우」로 친교나눠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때는 조선왕조 시대였다. 조선왕조는 지배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던 불평등 사회였다. 지배계층에는 양반과 中人이 있었으며, 피지배 계층으론 常人과 賊人들이 존재하였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피지배 계층은 권리가 수반되지 아니한 의무만을 지고 있었다.

이들위에 양반층이 군림하였으며 양반을 보좌하던 중인층이있었다. 이와 같은 엄격한 신분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조선왕조는 성립되었고 유지될 수 있었다. 따라서 불평등한 신분체제를 개혁하려던 모든 시도는 왕조체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창설된 당시 우리나라 사회는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각 신분층 사이에 존재하던 엄격한 차별이 사회의 발전에 따라 해이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기존의 신분제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동일한 자식임을 역설하던 천주교 교리는 참다운 복음으로 인식되었고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억눌림을 당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도 하느님의 고귀한 자식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순교자인 신대보는 법정에서 당당히 말하기를『천주교는 크게 평등한 것이다. 거기에는 大人도 小人도 없으며, 양반도 쌍놈도 없다』라고 하였다. 천주교의 교리는 신대보에게 인간평등의 원리를 제지해 주었다.

이 예를 통해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새롭게 터득된 천주교교리는 18세기 이후의 많은 민중들에게 인간평등에 대한 이념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평등사회를 구현하려는 실천적 행동에의 용기를 그들에게 부여해 주었다. 한국교회사의 전개과정은 이러한 실천적 행동으로 점철되어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교회는 평등사회를 구현하려던 민족사의 흐름을 강화시켜 주었다.

평등사회를 구현하려던 신도들의 노력은 교회창설 당시부터 드러나고 있다. 교회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양반 신도들은 자신의 신분적 특권에 자만하지 안했던 것이다. 그들은「가성직제도」아래에서 중인층의 신도들과도 신부의 직책을 나누어 가졌다. 중인과 양반이 평등한 존재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어 평민이나 그 이하의 신분계층과도 같은「교우」로서 교류하고 있었다.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던 신도들의 실천적 행동은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신도들의 태도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낮은 신분층은 白丁이었다. 이들은 타인으로부터 갖은 수모와 천대를 받아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정 출신이었던 黃日光에 대한 신도들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도들은 그의 신분을 잘 알지만 멸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들여 형제처럼 대우했다. 양반출신의 신도들도 그를 평등하게 대우하여 방안에 들어와 앉을 수 있는「영광」을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황일광은 이에 감격하여 말하기를『나게게는 천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내 자신의 신분에 비하여 지나친 대우를 받는 점으로 보아서 지상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세에 있다』라고 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신도들은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거부하고 인간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당시의 사회에 거침없이 영향을 미치며 성장해 나가는 집단이었다.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이공동체는 조정 당국자들의 눈에 혁명사상을 선전하는 불온한 무리로 비쳐졌다. 반면에 前近代的 사회체제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공동체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 되어갔다. 이 때문에 박해와 순교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평등한 사회의 구현을 위한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드러내 주었다.

근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주요한 특징은 신분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라는 점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천주교회은 이념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이와 같은 평등사회의 형성에 적지않은 기여를 하여주었다. 당시의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던 이러한 역사적 기능 때문에 崔必恭과 같은 순교자는『常漢 가운데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은 천주교를 신봉한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천주교회는 평등사회의 구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사회적 근대화를 촉진시켜 주었다. 평등의 이념을 구현하려던 노력 때문에 교회는 많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교회의 그 희생은 한국 근대사회의 형성에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사의 발전에 기여한 일단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점에서 한국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를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조광·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