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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1. 민족사와 교회사의 만남

조광·동국대 교수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2-22 제 124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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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만이 아닌 재창조로 민족사와 융화
세게교회 주목에 자만보다는 민족사에 의한 교회사 의미 검토해야
토착화 과정 통해 대내외적 발전 가져와
한국 천주교회는 기존 문화와의 충돌 과정을 통해 새로운 한국문화를 형성해 나가려고 노력을 해왔고 여기에서 토착화의 첫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 역시 크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창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가 한국사 발전에 끼친 영향을 대내의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서 한국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를 재고해 보기로 한다.<편집자註>

조선왕국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때는 1784년이다. 이해에 李承薰이 「北京」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후 거울明禮동 金範禹의 집에서 집회를 가짐으로써 이땅에 교회가 창설되었다. 한선교사의 도움이 없이 한국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이는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일로 기억되고 있으며 한국천주교회는 「신앙의 기적적인 전파와 교회창설」로 인하여 세계의 교회사가들에게 주목을 받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만감을 가지기 보다는 한국인 자신에게 천주교회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민족사에 있어서 한국교회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검토해 봄이 좀더 중요한 일일것이다.

조선후기의 한민족이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하였던 이질적인 사상체계였다. 우리민족이 천주교 신앙을 인식하기에 앞서 중국에 진출하였던 서양의 선교사들은 유교와 천주교를 상호교가 유교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補儒論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보유론은 천주교라는 이질적인 신앙이 동양사회에 전파될때 기존의 유교문화로부터 받게되는 충격을 흡수해 보려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보유론은 대부분의 유교적 지식인과 교회당국으로부터 아울러 배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에게 천주교가 인식되었으므로 2백여년전 조선후기 사회에 있어서 천주교 신앙은 일대 사상벅충격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의 사상계에 충격을 던져준 천주교 신앙은 한민족이 외부로부터 가져온 「受容文化」의 일종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기존 문화와의 갈등이 거의 필연적으로 야기되었다. 이 갈등의 과정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 신앙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었던 재창조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천주교회는 한국의 역사과정속에 포함될 수 있었고. 천주교회사는 한국사의 일부가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사와 민족사의 만남이 이룩된 것이며、한국문화와 한국역사의 일부로서 천주교신앙과 천주교회를 논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조선왕조의 정부 당국자들은 교회창설 직후부터 천주교에 새한 탄압의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 탄압의 열도는 시간의 경과에 비례하여 더욱 치열해 갔다. 조선왕조의 당국자들이 천주교를 탄압한 까닭은 천주교의 교리와 실천하는 신도들의 행위에 前近代的 王朝의 질서를 파괴하는 반체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천주교도 창조해 나가는 과정에서 朱子學의 가치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조선의 전통적인 사회질서에 대하여 거부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죽 조상제사의 부정. 신분질서체제 무시와 같은 천주교도들의 행위는 전근대적 사회에 있어서 반체제적 요소로 인정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권위의 원천으로 인정되어 오던 國王보다 높은 천주의존재를 말함으로써 국왕이라는 지위를 상대화 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법(良心法)」이 국법보다 우월함을 말하며 신앙의 자유로운 실천을 금지하는 국법에 정면으로 도존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하였다. 그들은 이와같이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이를 유지시키고자 하던 여러종류의 뤈위에 도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때문에 전근대적 왕조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던 탄압을 가중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기존 문화와의 이와같은 충돌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한국의 문화를 형성해 나가려는 노력을 보여주었고、여기에서 역사학적 측면에서 본 토착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는 교회창설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토착화의 과정에서 한국사의 발전에 영향을 준 교회의 역할을 검토함으로꺼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의 민족사적 의미는 대내적인 축면과 대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가 한국사회에 던져준 대근대적 정신을 일깨워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천주교회가 인간평등의 원리를 새롭게 강조하고 제시해 주었던 점과、여성과 아동의 인격을 발견하고 환인시켜 주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한글문화의 형성을 촉진시켰고、근대적 교육의 시행을 통하여 문화발전에 기요한 사실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회가 한국사에 미친 대외적인 영향으로는 국제사회에의 등장을 촉진했고 한국에 대한 독립된 단위로서의 인식을 촉구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몇회에 걸쳐서 검토해 봄으로써 한국교회사의 민족사적 의미를 음미해 보고자 하는 바이다.

<계속>

조광·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