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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압록강 - 초대 주한교황사절 방 주교의 최후] 5. 길고도 고된 죽음의 행진 2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1-25 제 1239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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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시련겪다 폐렴으로 쓰러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방안에 둘러찬 나머지 어느 한사람도 꼼짝할 수 없었다. 이로인해 그날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그러나 그다음날 아침 살아남은 사람들이 밖으로 끌려 나올때까지 누구도 그들이 죽은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방 주교는 여러차례 군인들과 민간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합동사죄를 베풀었다 그것은 어느누구도 그날 죽을지 혹은 살아남을 지를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로들은 병들고 너무나 쇠약해진 나머지 많은 자가 자기 담요를 길바닥에 버렸다. 그것을 들고 다닐 기력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낮동안에는 살아 남았다가 밤에 얼어 죽는 기회를 택하길 원했었다.

이처럼 혹독한 8일간의 행진끝에 포로들은 몹시 굶주리고 기진맥진한채 간신히 중강진에 도착했다. 그곳에 살던 몇몇 한국인 주민들은 자기네 집에서 쫒겨났으며 그 지역은 포로수용소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방 주교는 추운 한겨울에 자기편 군대의 아무런 직격소식도 듣지 못한채 사라져간 가엾은 사람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머지 포로들은 빈 교실에 나누어 숙영하게 됐다.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으로 그 사상자수가 극에 달했다.

그토록 잔인한 죽음의 행진동안 단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던 빌레모 신부는 도착 다음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각각 70세가 넘은 2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수사들도 각각 다음날 하루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성공회의 마리아 끌라레 수녀는 중강진에 도착하던 그날 죽고 말았다.

죽음의 행진 마지막날 방 주교는 감기에 걸렸다. 그는 결코 튼튼하지 않았으며 또 일생동안 오랜 투병생활을 수차 겪었기에 그처럼 오랫동안의 가혹한 시련에 견디어온 것이 너무나 놀라울 정도 였다.

부스 신부는 만일 타이거가 또 한차례의 잔인한 행위를 자행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방 주교는 회복됐을 것이라고 믿고있다.

중강진에 도착한 첫날 아침 7시에 타이거는 모든 포로들이 밖으로 나와 운동을 하도록 명령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기온은 영하 10도의 강추위였으나 타이거는 모든 포로들이 코트나 자켓드을 벗고 셔츠차림으로 미용체조를 하도록 했다. 이 체조가 끝난 다음 방 주교는 부스 신부에게로 갔다.

『으스스 몸이 떨리는군』방 주교는 말을 이었다.

『열이 점점 더해가는 것 같아』

그날밤 방 주교는 폐렴으로 쓰러졌다. 그가 그토록 중병인데도 불구、그다음날 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얼어붙은 운동장에 줄을 서 한시간이나 서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란 강추위와 싸워견디기 위해 발을 들었다 놨다 하는것 뿐이었다.

『난 더이상 지탱할 수 없을것 같군』방 주교는 부스 신부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그는 또다른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그날 한밤중 전형적인 공산주의 방식대로 모든 포로들은 그곳에서 약 4마일 떨어진「하장리」라는 마을로 즉각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에 도착한후 그들은 북괴군들이 그마을에 살고있던 한국인 주민들을 내쫓는 동안 추위속에서 떨어야만 했다. 기진맥진한 방 주교는 부스 신부가 조그마한 판자집으로 그를 안내하기까지 약한 시간을 덜덜떨며 서있었다. 그후 이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20명이 떠밀려 들어갔으며 거기엔 누울 방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얼마후 경비병 한명이 한국풍속대로 마루밑에다 불을 피우고는 문을 잠구어 버렸다. 그러자 방안은 연기와 열기 그리고 포로들의 옷에서 풍겨나는 악취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방 주교는 숨이 막혀 헐떡거렸다. 방 주교 옆에는 영국신문기자인 필립ㆍ데안씨가 꼭 끼워앉아 있었다.

『필립씨』방 주교는 그를 나지막한 소리로 불렀다.

『난 곧 죽을것만 같소. 날좀 도와주시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