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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2백주년을 생각한다] 15. 기념의회를 향한 제언 - 기념회의의 제문제 1

양한모·크리스찬사상연구소장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1-25 제 123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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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제기 1
교회사ㆍ민족사적으로 중대한 의미 지녀
신자들의 여론 집약으로 이뤄진 기념회-조상의 신앙유산 현재화 의지 보여
기념회의 개최 앞서 교회와자신 냉정히 반성할 때
한국 가톨릭교회의 창립 2백주년을 맞이하려는 역사적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 또 기대만큼 성취될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뭏든 간에 2백주년을 기념하는 교회회의는 드디어 출범하는것 같다.

1980년도 주교회의 추계정기총회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 주교 준비위원회로 준비태세를 재구성하고 기념회의 담당을 박정일 주교에게 위임하엿다. 그리하여 1월 10일 기념회의 준비를 위한 첫 모임이 개최되었다.

이것들은 확실히 주교단이 기념적 교회회의를 개최하겠다는 의지를 표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요새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 한국땅에 사는 모든 하느님 백성의 기대와 희망을 간직하고 새로운 교회의 시대 즉 복음적 새로운 시대를 향해서 이미 기념회의는 출범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에로 옮겨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 가톨릭의 기념회는 교회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민족사적으로도 중대한 일이라고 할만큼 큰 의미와 관계성을 지닌 역사적 사건이라 할수 있다. 혹자는 천주교의 교회적행사 즉 한 종교집단의 기념행사로 과소평가할 것이나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민족이 구세사적으로나 민족사적으로 처해있는 현실인것이다. 물론 그 교회회의가 꼭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이다.

어쨌든 이 글에서 기념회의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몇가지 점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하겠다.

첫째、기념회의는 왜 제기됐는가?

둘째、기념회의는 어떤 회의여야 하는가?

셋째、기념회의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넷째、기념회의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다섯째、기념회의는 좌절하지 않고 꼭 성공할 것인가?

여섯째、미래에의 전망-바람직한 교회상

記念會의 提起 이유

한국 교회에서는 지난 2년사이에 한국 공의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여론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울대교구 장위동 본당이 실시한 한국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행사를 위한 예비조사에서도 평시도와 성직자가 참석하는 교회회의의 개최를 적지않는 응답자가 요망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주관하였던 한국천주교 2백주년기념행사 준비를 위한 간담회에 참석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한국교회회의 개치를 열망하였다. 그리고 전국 사목국장ㆍ수도회 장상 및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대표 모임 등에서도 한국 시노두스를 개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집약되었던 것이다.

한편 가톨릭 신문은 사설로 한국 공의회의 시급성을 주장하며 교회내의 강력한 여론을 대변했다.

사실 주교회의가 기념회의를 2백주년 기념행사의 주요행사로 결정하는데 있어 이러한 교회내의 여론 형성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주교단의 권위적 결정으로 하달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들의 밑으로부터의 여론을 바탕으로 하여 주교단이 단안을 내렸다는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한국 가톨릭교회 전체에 기념회의를 할수 있을 만큼 분위기가 성숙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밑으로부터 분위기가 조성돼 가지고 지방교회의 필요와 이해를 바탕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성령의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뜻하지 않게 요한 23세에 의하여 소집、개최되었던 공의회였기에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틀림없었고 또한 오랜동안 정적이면서 틀릴 수 없는 불변의 존재로만 생각해왔던 교회에 너무도 큰 충격적인 문제의 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공의회를 마친지 꽤 오랜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혼란과 혼미를 거듭하며「미혹의 영」(이사야 19∼14) 이 판을 치고 있는듯 하다. 사실 이땅의 하느님의 백성들 중에서 얼마만큼이나 공의회를 꿰뚫어 흐르고 있는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해서 이해하고 현대화라는 가르침에 따르고 있는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때 한국교회에서 2백주년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하느님의 백성을 전체의 생각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교회회의로 수렴한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회의 개최에 대한 하느님 백성들의 밑으로부터의 촉구는 확실히 한국 가톨릭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전통성에서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초에 국법이 西敎를 언금하고 邪學이라 지목하여 신도를 잡으며 더러운마로써 천주를 배반하는 맹세를 하도록 위협하여 교를 배반하는 자는 문득 赦하였다. 이때에 와서 나라안을 크게 수색하니 포승에 묶인 자가 길에서 서로 바라보일 정도였고 포청옥이 만원이 되어서 이루 裁決할 수도 없었다. 그중에는 어리석은 백성 어리석은 아낙 어린아이들 철없는 자가 많았다. 포장이 민망하게 여겨서 敎를 배반하다는 맹세를 하도록 타일렀으나 신도들은 듣지 않았다. 이에 刑杖으로 때려서 기어코 회개시키고자 하니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고 피가 청위에까지 튀어올랐다. 신도들이 문득 환호하기를 血花가 몸에서 나니 장차 천당에 오르겠다 하였다. 포장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드디어 옥안에다 묶어 놓고 차례대로 목졸라 죽였다.

죽일때마다『능히 교를 배반하겠는가』물었는데 비록 어린아이들이라도 또한 그 부모를 따라서 천당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大院君이 듣고서 다 죽이도록 명하고 어린아이들만 사하였다. 시체를 水口門 밖에다 버려서 산같이 쌓이니 백성들이 벌벌떨며 위령을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 기록은 朴齊炯이 저술한 近世朝鮮政에 나오는 한 귀절이다. 이렇게 한국의 가톨릭인들은 피로써 물들인 이 땅 위에서 피의 꽃을 가꾸며 고통과 죽음의 역사를 살아서오늘날 교회창립 2백주년이라는 해를 바라보고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한국 가톨릭인들은 안이하게 공짜로 조상들의 피의 댓가를 바라고 그 거룩한 시체를 미끼로 하려는 따위의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있다. 오히려 그 조상들의 신앙의 유산을 생생하게 現在化하려는 것 뿐이다.

그러기에 제 2차「바티깐」공의회에 참석했던 교부들이 교회를 도마위에 놓고 겸허하게 깊이 반성하여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귀위와 권력을 포기하고 종교적 독점이라는 형태에서 벗어나 온갖 일들과 대화하려는 자세를 가다듬고 나왔듯이 우리 한국가톨릭도 냉정히 깊이 교회와 더불어 자기 자신들을 반성적으로 살표봐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다. 더우기 제2차「바티깐」공의회를 끝마친지 15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한국교회안에 얼마만큼이나 공의회의 정신이 올바르게 침투돼서 의식화 되고 있는냐는 지문을 자기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계속)

양한모·크리스찬사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