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죽음의 압록강 - 초대 주한교황사절 방 주교의 최후] 3. 죽음의 행진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1-01 제 123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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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군 후퇴때 잠시 자유찾았으나 다시 피체
포로들은 평양으로 실려 갔다.그곳은 수년전 방 주교가 한국선교들 위해 메리놀회 본부를 설립한 곳이기도했다.

거의 두달 가량이나 이들은 학교 교실에 감금돼 있었다. 밤낮으로 이들은 불려 다니며 심문을 받았다. 이들의 과거생활이 낱낱이 다 드러나지 않을수 없었다.

급식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루 밥 1온스와 무우잎으로 끓인 국 그리고 물 두모금이 고작이었다. 방 주교는 이로인해 체중이 50파운드나 줄었으며 마침내는 이질과 기생충병을 앓게됐다. 부스 신부 역시도 체중이 크게 줄었다. 포로들은 물론 전쟁뉴스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마 전투기들이 평양을 폭격하는것을 보았을때 북괴군이 결코 쉽게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북괴군이 자기들을 북으로 이동시킨다는 발표를 듣고 그들은 맥아더 장군이 반격을 개시했음을 알아치렸다. 북으로의 행진은 그누구보다 방 주교에게 슬픔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그것은그가 지나가는 마을들이 2차대전 이전 그의 행복했던 날들을 회상케 했기 때문이었다.

「소포」를 지나면서 그는 자기가 1928년 건립했던 중심지의 큰집을 보았다. 기차안에서는 또 처음으로 북괴군의 포로가된 미군들을 만났었다.

많은 미군병사들이 부상당했으나 그어느 누구도 이들을 치료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6일이 지난후 포로들은 「만포」에 도착했다.평상시 이길은 10시간이면 충분했었다.

포로들은 대부분이 선교사와 외교관리들인 59명의 민간인과 7백25명의 미군들로 돼있었다. 이들은 국경의료검역소에서 네줄로 나누어서 압록강에서 목욕을 하면서 몸에 붙은 빈대나 이 등을 씻어내도록 명령받았다.

당시 남쪽에서의 전투형세는 급변했다.뛰어난 전략가였던 맥아더 장군은 북괴군을 분쇄했으며 북괴군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로인해 감시병들은 방 주교와 동료포로들을 버려두고 도주해 버렸다.그래서 이들은 자기가 원하는데로 오갈 수 있었다.이들은 미해병군을 찾아나섰다.

그날은 바로 방 주교의 62회째 생일날이었다. 부스 신부는 통닭 두 마리를 간신히 구입해 방 주교의 생일을 축하했다.그것은 오랫만에 갖는 생일축하였으며 동시에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황은 극적으로 돌변했다. 포로들은 미군대신 압록강 국경을 넘어 물밀듯이 넘어오는 수만명의 중공자원대와 마주쳤다.그들은 날카로운 갈퀴등을 들고 무거운 보따리를 지고있었다.

그들은 걷지않고 진격해 오는 미군을 대항키위해 전장까지 구보했다. 당시 맥아더장군은 「워싱턴」으로부터의 명령으로 압록강을 넘어 적의 보급기지를 공격할 수 없었다. 바로 이 명령의 간접적인 결과로 시민과 미군포로들은 자유대신 다시 체포되는 운명에 놓이게됐다. 밤이되자 이들은「만포」의 불타 파괴된 집으로 끌려갔다.그러나 집안에 들어갈수 없는 미군포로들은 강변에서 밤을 지내야 했다.기온은 급강하해 이날밤 10명의 군인들이 동사하기도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