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고난과 역경、진통의 150년 -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의 발자취] 4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1-01 제 1236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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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150주에도 일치 절실
해방이후 한국은 선교의 황금기 맞았으나 북한은 전멸상태
62년 교구、대교구 승격후 눈부신 발전
한국교회의 사목、행정、성사집전、관습등에 있어서 통일성이 요구된 데에는 특히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미 교구가 5개로、그것을 맡아보는 선교단체도 3개로 늘어났고. 더우기 이 3개의 선교단체가 모두 국적을 달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교구와 선교단체 사이의 차이가 오히려 한국신자들에게 불편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신자들은 생계를 찾아 좁은 땅에서 끊임없이 이 교구에서 저 교구로 여행하거나 移住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성사를 받는데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한국교회의 古來의 전통이며 고유한 교회법이라고 말할수 있는 「한국교회지도서」를 말하더라도 대구교구가 분리되면서 일개의 「교구지도서」가 되어버렸다. 즉 대구대교구는1917년「대구교구지도서」를、서울교구는 1923년「서울교구지도서」를 각기 반포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청년운동으로 말하더라도 그 통합이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3ㆍ1운동으로 활발해진 청년운동은 교회의 젊은이들을 크게 자극하여 교회내에 많은 청년단체회가 서울과 대구를 중심으로 연합체를 이루기는 했으나 전국적인 통합에는 이르지 못했다. 대구와 서울의 청년회는 힘에 부치는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구청년회에서 1927년 「天主敎會報」를 발간한데 자극되어 같은해 서울청년회에서는 「별」을 발행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점차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조선교구설정 1백2주년을 맞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일치를 회복하기로 하고、이를 위해 최초의 한국공의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한국공의회는 무엇보다도 세가지 점에서 한국교회에 일치를 초래하였다. ①한국교회에 공통된 사목지침서 즉「한국교회지도서」(Directorium commune)를 반포하였다. ②「성교요리문답」을 위시하여 여러가지 교리문답을 폐지하고 새로운 통일된 교리서 즉 「천주교요리문답」을 간행하였다. ③교회의 정기간행물을 통합할 목적에서 5개 교구출판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이 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1933년 서울에서 「가톨릭 청년」이 창간되었다.

그러나 「가톨릭청년」은 1936년 일치를 깨지않으려는 뜻에서 자진하였다.

왜냐하면 평양교구에서 약속을 어기고 따로 「가톨릭朝鮮」을 발행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미구에 「가톨릭 朝鮮」도 폐간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파리外邦傳敎會의 회칙에 따르면 가능한한 조속히 본국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본국인 성직자에게 교구를 넘겨주는 것이 이 회의 三大목표의 하나이다. 이 방침에 따라 서울교구는 이미 1928년 邦人敎區로 설정했던것이고. 이어 대구교구도 1931년 전라북도를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게 되었는데、나중에 설정된 감목대리구가 먼저(1937) 교구로 승격되었다. 어쨌던 이로써 전주교구가 한국 최초의 방인교구가 되었다.

한편 방인교구를 탄생시키지 못한 서울교구는 서울교구의 교구장직자마저 내놓아야 하는 운명의 날을 맞게 되었다. 즉 1942년 日帝에 의해 외국인 교구장직의 사퇴가 강요되니 부득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애당초 日人에게 넘어가기로 되었던것이 한국인에게로 넘어온 것만은 불행중 다행한 일이기는 하나 他意에 의해 교구장직을 한국인에게 물려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못되었다. 어쨌든 전화위복이랄까. 이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한국인 主敎들 갖게 되었고、 盧基南 주교가 서울교구장에 취임하였다. 일제의 횡포는 서울교구에 그치지않았고 나아가서 平壤ㆍ大邱ㆍ光州의 외국인 주교에게도 사퇴가 강요되었으며 日人主敎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평양교구만은 한국인 주교가 맡게 되었다. 그 결과 洪龍浩 주교가 평양교구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일제의 탄압은 太平洋전쟁을 계기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평양교구의 미국인 주교와 신부들이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光州와 春川교구의 아일랜드系 주교와 신부들이 拘禁되었다. 또한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가 모두 폐쇄되었다. 德源의 신학교만은 인가를 받은 학교여서 간신히 폐교를 면할 수 있었다.

1945년 일제치하로부터의 해방은 한국교회에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갖다주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완전한 종교자유시대를 맞게되었으나 북한교회는 공산치하에서 다시금 수난을 겪게 되었다.

해방을 맞는 한국교회는 최초의 5년간은 그렇게 큰 발전을 이룩하지못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국내정세의 혼란과 정치적불안에 있었고、 6ㆍ25동란으로 上昇一路의 개종운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휴전이후、 특히 195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일찌기 없었던 개종운동의 황금기를 맞게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이시기에 있어서 한국인 신부 수가 놀라운 증가를 보였고 한편 수도단체와 기타 국제기구가 대거 한국에 진출하여 선교활동외에 교육ㆍ문화ㆍ의료ㆍ사회사업등등 여러분야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한 덕택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란 말대로 이때부터 냉담자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되었다. 그것은 새로 영세한 수많은 신자들에 대해 충분한 再敎育이 뒤따르지 못한데다가 이른바 「라이스ㆍ크리스찬」이 개종자가운데 적지않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한국의 교회가 눈부신 발전을 한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교회는 6ㆍ25동란을 전후하여 거의 전멸되었다. 차제에 우리는 북한교회가 결코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교황님의 말씀을 정말 잊지말아야 할것이다.

1962년3월 교황으로부터 한국교회에 더할수 없는 영예가 주어졌다. 즉 한국교회내에 敎階制度가 설립됨으로서 모든 교구가 설립됨으로써 모든 교구가 정식교구로. 그리고 서울 대구 정식교구로. 그리고 서울 대구 광주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상 획기적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 이유가 나변에 있는지 우리는 반성해야할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의 교구수는 해방이전에 설정된 서울 대구 전주 광주 춘천과 해방이후에 설정된 대전 부산 청주 인천을 합쳐 9개였고 교계교구、즉 수원 원주 마산 안동 제주를 합치면 모두 14개교구를 헤아리게 되었다. 실로 한국교회는 1950년대 후반기부터 놀라운 교구발전을 보였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이 말이 역사가에게는 귀에 거슬릴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역사를 되풀이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조선교구설정 1백주년을 맞은 한국교회에 그 못지않게 1백50주년을 맞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일치가 절실히 요구되고있다.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교황님도 그것을 한국교회의 현실문제로 지적하지 않았던가! 이 글을 맺으면서 필자는 50년전 한국공의회를 통해 일치가 회복되었듯이、교구설정 1백50주년을 일치회복의 계기로 삼고 이를 위해 제2차 한국공의회의 개최를 거듭 제언하는 바이다. (끝)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