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고난과 역경. 진통의 150년 - 조선교구설정 150주년의 발자취] 3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02 수정일 2011-05-02 발행일 1980-12-25 제 1235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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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 주교 재직시 한국교회 발전의 초석다져
한불조약후 전교에 활기. 민 주교 시절에 큰 결실
1848년은 마침 한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용한지 1백년이 되는 해였다. 이 뜻깊은 해에 블랑(Blanc白) 주교가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에 취임하게되었다. 2년후 韓佛條約이 성립되었고.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1백만년에 地下敎會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블랑 주교는 종교의 자유가 어느정도 묵인되고 한국교회의 장래가 보증됨에 따라 한국교회의 장래가 보증됨에 따라 한국교회가 꿈꾸어오던 여러가지 시설과 사업을 서둘렀다. 그는 신학교를 두메로부터 서울 용산으로, 인쇄소를 일본으로부터 서울로 옮겼다. 그는 시노드를 개최하고 새로운 한국교회지도서를 반포하였다. 그는 서울문안의 鐘峴등지에 장차 대성당. 주교관. 성당. 수녀원 등을 건설하기위한 대지를 매입하고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가 시작한 고아원과 양로원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하기위해 프랑스로부터 수녀들을 불러 그일에 전념케 하였다.

그는 우선 선교사들의 활동이 보다 자유로운 원산ㆍ제물포ㆍ부산 등 개항시에서부터 본당을 세워나갔다. 블랑 교구장의 재직기간은 6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이짧은 기간에 이모든 일을 해냈고. 그것이 이후 한국교회발전에 굳건한 터전이 구실을 하게되었다.

블랑 주교의 뒤를이어 뮈뗄(Mutel. 閔) 주교가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돼었다. 이 교구장 밑에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되는데 그것은 그가 가장 뛰어난 교구장의 나분이었고. 동시에 한국교회사상 그의 재직기간이 가장 길었기때문이다. 43년이란 긴 그의 재위기간은 1891년을 중심으로하여 크게 둘로 즉 前期를 본당의 발전시대. 後期를 교구의 발전시대로 특징지울수 있다.

교세통계에 의하면 1890년 본당이 13개. 성당 (經堂 포함)이 7개였다. 그러던것이 1900년에는 본당이 35개 성당이 40. 1910에는 본당이 54. 성당이 69로 놀라운 증가르 보였다.

이시기에 허용되기시작한 성당건축은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발전을 보였다.

처음에 高山의 되재 성당처럼 순 한국식이 던것이 약현의 성당과 종현의 대성당에서 벽돌의 洋式건축이 도입되었고. 이러한 후기 고딕형의 양식건축은 그후 크게 유행하게되었다. 그러나 나바위 성당처럼 간간이 한국식과 서양식이 절충도니 건축양식이 나타남으로써 단순한 모방이 아닌 토착화의 경향을 보이기도하였다.

이 시기에 본당이 계속 증설되고 지방교회가 발전할수있는 것은 上記한바와 같이 韓佛條約의 덕택이었다. 그러나 한불조약으로 종교자유가 보증된 것은 결코아니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서울과 제물포같은 開港地에서는 토지도 구입하고 건축도 할수 잇게 되었고.. 따라서 선교사의 定着과 본당의 시설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선교사의 정착이 허용되지 않았다. 조약에 의하면 프랑스 선교사들은 護照(여권)를 지니면 언어와 윤리등을 배우거나 가르치기 위해 지방을 여행할 수는 있었지만 정착은 할수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계속 지방정착을 고집하고. 새로 많은곳에 정착하였을 뿐만아니라 대지를 구입하고 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선교사와 지방관리사이에 압력이 불가피하였고 이 때문에 지방에서는 이른바 사군란이 끊이지않았다. 게다가 洋人과 천주교인에 대한 선입견과 적대심 洋大人을 이용하려는 假託信者. 프로테스탄트들의 중사. 정치적불안. 東學亂과 淸日戰爭 등등이 사군란을 더욱 부채질하였고 그결과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신자들이 약탈당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고 제주도에서는 신자들이 대량으로 학살되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군란을 겪으면서도 한국교회는 인내와 용기로써 지방을 계속정복해 나아갔다.

선교사의 수도 급속도로 늘어나 1911년에 48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한편 용산신학교도1896년이래 1911년까지 18명(그중 3명은 사망)의 한국인 신부를 배출하였다. 이들의 선교활동으로 복음이 멀리 제주도ㆍ거제도ㆍ울릉도에까지 그리고 국경을 넘어 間島에까지 미치게되었고. 1911년에 가서 신자수가 7만7천명에 도달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한국천주교회는 교육과 언론을 통해 國權守護運動에도 적극 참여하엿다. 그러나 교육사업은 개신교에 비하여 크게 부지하엿다. 그이유는 전쟁난에도 있었지만 敎師難이 더욱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뮈뗄주교는 독일의 베네딕또회원에게 고등교육사업을 위촉하였다. 그들은 1909년 서울에 와서 2년후 신자교사양성을 목적으로 사범학교를 시작할수있었으나 얼마계속되지 못했다. 이미 때가 늦었엇다. 왜냐하면 한일합방으로 이미 교육열이 크게 식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베네딕또회원이 운영하던 직업학교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천주교신자들의 직업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06년 순한글의 주간지로 발족한 京鄕신문은 1910년 일제의 탄압으로 페간되기까지 4년간 일제의 식민주이에 대항하여 언론투쟁을 하였다. 京鄕신문은 특히 진정한 救國ㆍ開化ㆍ自主의 길을 밝힘으로써 애국과 계몽의 旗手역할을 했다.

경향신문은 또한 부록으로서신자들을 대상으로 「보감」을 발간하고 이를통해 교리와 한국교회사에관한 의식을 고취하였다. 「보감」도 경향신문과 운명을 같이 하였고 이래 그後身으로서 순종교지인 「경향잡지」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이란 정치적 상황은 교세면에서도 위축현상을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영세자의수가 줄어들었고 한편으로는 시자수가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하와이와 간도로떠나는 이민의 숫자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제1차대전이 터지게 됨으로써 선교사의 3분의1이 소집되어 한국을 떠났고 한편 프랑스로부터의 재정적원조도 끊겼다. 1912년에 서울교구의 본당이41개이던것이 1917년에 38개 본당으로 줄었고 그간 신자수도 겨우 5천명이 증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선교사들이 귀환함으로써 교세는 곧회복되었다.

1925년은 물론 한국교회전체를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뮈뗄 주교 개인을 위해서 더할 수 없이 기쁘고 영광 스러운 해가 되었다.한국의 순교자79위의 시복은 곧뮈뗄 주교의 「순교자의 굼을 피어나게하라」는 표어자체의 실현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5년은 그에게 희비가 엇갈린 해가 되었다. 그는 대주교로 승격되는 기쁨과함께 가장신임하던 그의후계자 드로레스(devredㆍ兪)보좌주교를 잃은 슬픔을 겪어야했다.

1911년이래 한국교회는 교구발전의 시대를 맞게되었다. 이 해에 대구교구가 서울에서 분리되어 독립교구로 설정된데 이어 1920년에는 원산교구(독일계베네딕또회)1927년에는 평양교구(미국계메리놀회) 1928년에는 延吉교구 (독일계 베네딕또히)가 설정됨으로써 모두 5개교구가 되었다. 그리고 1928년 邦人敎區의 준비단계로 황해도가 監牧代理구역이 되었다. 교구의 증가는 활동의 다양성을 가져오는 반면 통일과 일치를 위협할수도 있었다. 사실 한국교회는 행동의 다양서보다는 점차 통일성을 더욱 필요로하게 되었다.<계속>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