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고난과 역경. 진통의 150년 - 조선교구설정 150주년의 발자취] 2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
입력일 2011-05-02 수정일 2011-05-02 발행일 1980-12-14 제 1234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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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중에도 선교사들 입국
영해회 도입ㆍ신학교 등 설립
교리서저술ㆍ보급으로 선교사 부족 보충-교세는 급증
모방(羅) 신부에 이어 샤스땅(鄭) 신부가 그리고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 앵베르(范) 주교가 입국하였다. 이렇게 조선교회는 선교사의 파견도 교구장의 임명도 걱정할 필요가없게 되었다. 교황청과 파리外邦傳敎會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을수있게 됨으로써 조선교회의 장래는 이미 보증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대외적인 보증도 조선의 선교사들에게는 안전한것이 못되었다. 박해가 일어나고 국경의 감시가 심해지면 선교사들의 입국이 불가능해질수 있었따.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이에 대비하고자 곧 한국인 聖職者양성에 착수하였다. 金大建 崔良業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는 한편 국내에서도 성직자양성을 서둘렀다.

박해는 조선교호를 또다른 면에서 위협하였다. 즉 박해로 유일무이한 주교가 희생되는날 主敎職이 사라지게 되고 주교직이 사라지면 司祭職의 永繼이 문제시될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비하는 길은 주교직의 공백기를 최소한 줄이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교황청이 조선교구장에게 繼承權을 가진 보좌주교를 선택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와 두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 신자들을 찾아 성사를 주고. 새 공소를 창설하고. 회장을 임명하여 공소신자들을 돌아보게 하였고 바쁜 전교생활중에서 신자들에게 요긴한 기도서까지 편찬하였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조선교회의 대내적인 발전의 기반을 착착 굳혀가고 있을때 돌연 1830년 대박해가 일어났고. 이 박해로 말미암아 3명의 선교사가 모두 희생되었다.

조선교구는 또다시 목자가없는 고아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교회가 再起할 힘은 대외적으로 충분히 보증되어 있었다.

이미 선교사들이 조선입국길에 올라있었고. 그중 페레올(高) 신부는 보좌주교로 임명되어있었으므로 자동적으로 교구장직을 이어받아제3대교구장이 되었다. 더우기 선교사들은 신품공부를 거의 마친 조선신학생 金大建과 崔良業을 동반하고 있었다.

金大建副祭는 그의 용감하고도 끈질긴 入國試圖로 마침내 자신의 입국을 성공시켰고. 나아가서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해 조각배를 이용하여 「上海」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다음 페테올 주교와 다블뤼(安) 신부를 같은 조각배에 태우고 조선에 潛入하는데 성공하니. 때는 1845년 10月이었다.

1846년의 박해로 인한 金大建 신부의 순교는 조선교회를 위해서는 이루 말할수없는 소실이었다. 그러나 미궁 崔良業 신부와 매스트르(李) 신부의 입국으로 보충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그간 조선교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기력이 쇠약해져서 입국7년만인 1853년에 병사하게 되었다. 그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만3년간 매스르르 신부가 교구장직을 대리로 맡아보게되었다.

그는 재임 기간중 嬰孩會事業을 도입하고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함으로써 큰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嬰孩會의 보조로 미신자 고아양육하게한 것은 한국교회사상 최초의 자선사업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 무렵 전교활동의 분야를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1850년 哲宗의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默認政策에 힘입은 것이었다.

때마침 조선교구는 아주 유능한 교구장을 맡게됨으로써 向後10년간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마침내 1856년 제4대 교구장 베르뇌(張) 주교가 2명의 선교사를 대동하고 입국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교회가 발전하려면 우선 일군이 많아야 하고. 財力이 풍부해야 함을 너무나 잘알고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수시록 「빠리」本部에 일군의 增員을 간청하여 마지않았고 그 결과 10명의 새 일군을 얻게 되었다. 그 덕택으로 그간 崔良業 신부와 4명의 선교사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1866년까지 교구장을 위시하여 12명의 선교사가 활동을 계속핤 있었다. 이리하여 베르뇌 주교는 멀리 제주도와 황해도에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입국 당시 6천명에 불과하던 신자를 2만여 명으로 증가시킬수 있었다.재정면에서도 그는 포교성. 전교회. 영해회로부터 해마다 보조를 받았고 그중에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질때 성당과 학교등을 세우기 위해 거액을 저축까지 했었다.

아무리 선교사의 수가 증원되었다 하더라도 12명의 선교사를 갖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2만여 명의 신자를 제대로 돌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공소회장의 임명으로 이를 보충하였고 특히 교회서적의 저슬과 보급을 통해 선교사의부족을 메우려 했다. 그는 다블뤼(安)보좌주교로 하여금 교회책을 번역하고 또는 저술하는데 전념케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처음으로 국내에 있는 선교사 중에서 그의 보좌주교를 택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조선을 가장 잘아는 선교사로부터 적절한 助言과 보좌를 받게 되엇다. 다블뤼 주교는 부지런히 저술활동을 버였고. 한편 베르뇌 주교는 木版印刷所의 시설을 서둘러 마침내 1864년~5년내에 걸쳐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오리문답등 10여종의 서적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보급시키기에 이를렀다. 그러나 이때 1866년의 박해가 터졌고. 그것은 일찌기 볼수 없었던 대박해로 확대되었다. 이 박해로선교사 3명을 제외한 2명의 주교와 7명의 선교사가 희생되었고. 한때 그렇게도 번창했던 조선교회는 이제 페허밖에 남지않게되어따.

그러나 리델(李)을 위시하여 살아남아 중국으로 피신한 3명의 선교사들은 곧 인근 만주땅에서 조선교회의 복구작업에 착수하였고 1869년 리델 주교가 제6대교구장으로 임명됨으로써 복구작업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제5대좌 주교였으나 제 4회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그보다 먼저 순교하기까지 20여일간 자동적으로 제5대 교구장이 되었다.)

끈질긴 입국시도 끝에 리델 주교는 박해로부터 10년이 지난 1876년 2명의 선교사를 입국시켯고. 이어 자신도 입국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 갇혔다. 이때 조선에서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즉 리델 주교가 살해되지않고 중국으로 送運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미구에 조선교우들도 배교하지 않았는데도 석방되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종교자유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교회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884년의 교세에 의하면 신자가 1만2천6백 명. 선교사 8명. 영세자가 7백27명. 예비자가 무려 1천명에 달했다. 그러나 아직은 새 건설이라기 보다는 복구작업에 불과했다.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