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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과 기다림의 계절 대림절] 2. 크리스마스 유래와 발전과정

이정운 신부ㆍ구포동본당주임
입력일 2011-05-02 수정일 2011-05-02 발행일 1980-12-07 제 123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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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탄생 경하의 표현으로 축제 시작
성탄의 참듯 새기는 자세 갖도록 해야
중세때 경건한 종교축제 절정-종교개혁 이후 유흥으로 변모
①그리스도의 탄생과 서력기원

②크리스마스의 유래와 발전과정

③크리스마스의 명칭과 인사

④크리스마스 민속캐롤과 詩歌

⑤성탄전례와 산타클로스

로마제국시대에는 국가통치자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공적인 관례가 있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국가경축일의 관례는 항상 대상인물의 생일과 일치했으며 그 인물이 죽은 후에도 거행됐다.

초기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주님」이라는 칭호를 붙였을 뿐만아니라 외교인들이 사용하는 경칭들처럼 자연적으로 그리스도께 경칭을 붙이며 그리스도의 탄생을 慶祝하고자하는 심정을 느끼게 됐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하하는 지방중에서 가장 오래된것은 동방이다. 동방교회신자들은 1월 6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경하했던것이다.

로마교회는 3백30년경 마지막 박해가 끝난후 본격적으로 12월 25일 그리스도의 성탄을 경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4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이같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하하는 풍습이 보편화됐다.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성탄일로 정한데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자료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지않다. 몇몇 교부와 작가들은 12월 25일이 그리스도의 성타일이라는 증거로 로마제국의 권위로 실시된 호구조사의 공적인 기록을 들고있다. 요한 크리소스로모 성인도 이같은 의견을 지지하며 동방교회안에 12월 25일을 소개했다. 그러나 퀴리노의 호구조사(루까2ㆍ2)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때문에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명록에 기록됐다는 것은 신빙성이 회박한 의견이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또다른 설명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것은 아우렐리아노 황제때부터 지켜오기 시작한 태양신의 탄생일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당시 전로마제국에서는 12월 25일 태양신 미트라스(Mithras)를 경공하는 외교적 축제가 성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을 세상의 빛이시고 정의의 참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삼고 경하했다는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볼수 있다. 역대 가톨릭교회교황들은 눈에보이는 태양의 예배를 그리스도의 경배로 전환시키고 백성들을 변화시키기위해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택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초세기를 거쳐오는 가운데 신자들은 외교적 축제와 크리스찬적 축제사이의 차이성을 냉철하게 구별하고 있었다. 간혹 외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신자들 가운데 태양신경배의 외교적 상징들을 드러내는 신자들에 대해 교회장상들은 직접적이고 엄격하게 질책했던 것이다. 이같은 경고는 3세기때의 학자인 떼르뚤리아누스의 저서와 4ㆍ5세기의 크리스찬작가들의 저서. 성아우그띠노와 교황 레오 1세의 강론집등에서 볼수있다.

이같이 초기교회때부터 중요한 축제가 된 크리스마스는 5세기때부터 교회전례력의 기점이 된다. 그리고 10세기경에 이르러 대립시기는 크리스마스주년 전체의 한부분으로 형태를 이루며 교회력의 시작이되었다.

1천1백년경까지 유럽의 모든나라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이지역의 어느곳에서나 신심과 환희를 가지고 크리스마스 축제가 거행됐다. 또한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각본당과 수도회에서 뿐만아니라 가정에서까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일반적인 축제가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색적인 종교축제를 거행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 캐롤과 연극각본들이 씌여졌고 대부분의 즐거운 크리스마스 관습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은 유럽제국내의 크리스마스 축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사회적요인과 교회내의 내부적인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종교개혁은 신학적인 면에 까지 침투되어 초기교회때부터 거행돼오던 미사전례까지 거부하는 결과를 빚어냈고 이로 말미암아 크리스마스라는 어원이 밝히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말의 사용까지 거부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크리스마스축제의 중심인 미사봉헌이 제지됨에 따라 성체성사 성무일도 준성사의 모든예식이 사라지게됐고 찬탄하고 감격스러운 성모마리아의 행렬. 성인들이 공경도 사라지게 됐댜.

풍부하고 영광스러운 축제로서의 분위기가 잔존되고있는 것은 크리스마스날의 설교와 기도예식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관습안에 많은것을 살려했지만 이미 깊은 종교적 영감을 잃어버렸고 자연히 새로운 크리스마스는 유홍으로 전화되어갔다. 영국청교도들은 로마로부터 분리된 이후에 영국 교회의안에서 허락된 종교예시까지도 단죄하였다. 반면에 독일 루터파들을 포함한 어떤집단은 아기그리스도께 대한 다감한 신심을 보전하고 그들 교회내에서 마음안에서 그리고 가정안에서 깊은 영신적인 길로 크리스마스를 지냈던 것이다.

영국크리스마스는 1660년 수도원의 복구로 마침내 복귀하게 됐다. 이른바 새로운 크리스마스로. 이 축일의 영신적인 면은 교회봉사자들의 관심여하에만 맡겨져있었고 가정안에서는 일반적 유홍형태를 취하고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이들에게 착한 마음을 보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박애정신을 보여주며 보다 세계적인 축제로 고결하게 생각한다.

영국의 이러한 서민적축제는 챨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등에 잘 기록돼있다.

미국 크리스마스축제는 물론 유럽인들에 의해 도입된것으로 각 민족들이 전통적 관습에 따라 크리스마스를 지내오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 미국에서는 영국의 청교도인들에 의해 크리스마스행사가 박해를 받는 등 갈등이 심했으나 아이랜드 및 유럽대륙인들이 이주해옴에따라 성대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주해온 가톨릭신자들은 구유를 가져오고 그들고향의 성탄성가를 가져오는등 종교적 전례행사를 그대로행했다. 곧 그들의 표양은 이웃사람들을 이끌었고 그들이 고유한 관습으로 만들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들은 크리스마스트리 관습을 그대로 행하고 겔트인들은 창문에 불을 다는 등 각기 색다른 크리스마스행사를 행하면서도 타민족의 좋은 관습도 받아들여 보다 더 풍부한 행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듯 점차로 사람들은 옛 전통중에 갖아 훌륭한 것을 연구하고 다시 공동실천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또한 서로 협력하여 성탄의 참된 축제. 아름다운 축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성실한 노력을 함께 기울이게되었다.

이정운 신부ㆍ구포동본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