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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36)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실재인가, 개념인가?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입력일 2011-04-20 수정일 2011-04-20 발행일 2011-04-24 제 2743호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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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의(義) 수련 위한 개념
유가 관점 천당·지옥 불필요
그런데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은 실재인가, 개념인가?

리치는 관념으로 이해될 두 단어를 하느님께 순응하는 세 번째 지혜로운 태도로 어떤 수도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VI-10)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와 그의 제자 유니페루스(Juniperus)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사악한 마귀가 유니페루스를 시기 질투하여 스승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 이렇게 예고했다. “유니페루스의 덕은 진실로 크지만, 천당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 이는 하느님의 엄명이니 바꾸지 못한다.” 프란치스코는 매우 놀랐지만, 이 말을 누설할 수 없어서 제자를 볼 때마다 심히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곤 했다. 스승의 태도가 의아한 제자는 어느 날 스승에게 나아가 물었다. “저는 날마다 열심히 하느님을 공경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저를 보시는 눈이 예전과 다르고, 또 자주 눈물을 보이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스승이 제자의 요청에 어렵게 답을 하니 제자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찌 근심할 일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사물을 주재하시니 그 뜻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천당이나 지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극히 존귀하시고 지극히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마땅히 공경하고 사랑할 따름입니다. 지금 비록 저를 버린다 해도 제가 어찌 조금이라도 게으를 수 있겠습니까? 더욱 더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길 따름입니다. 지옥에 있게 될 때에 곧 바로 하느님을 섬기려 하여도 그렇게 하지 못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홀연히 깨닫고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내가 앞서 들은 바가 틀렸다! 도리를 배움이 이와 같다면 지옥의 재앙을 받는 일이 어찌 생길 수 있겠는가?(?哉, 前者所聞! 有學道如斯, 而應受地獄殃者乎)”

리치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천당이나 지옥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인(仁)과 의(義)를 수련하기 위해 빌려온 개념으로 이해한다. 단순히 즐거움과 고통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문자적 의미에서만 그렇다. 천당에 오르는 사람은 이미 마음을 선에 두고 있으니 편안함이 바뀔 수 없고, 지옥에 내려가는 사람은 악에 지향을 두고 있으니 그 또한 어둠이 바뀔 수 없다. 천당과 지옥은 사람이 덕을 추구하며 불선한 곳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하는 데 있고, 죄악에 물든 소인배들과 멀어지도록 하는 데 있다. 천당과 지옥은 실재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는 상징적 은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응보를 현실적 개념으로 보려는 유가(儒家)는 자신이나 자손(子孫)에 국한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즉 현실에서 보상과 응징을 받는다는 유가적 관점에서 사후의 천당과 지옥의 개념을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 민중에게 천당과 지옥 논쟁은 사실 종교적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주제이다. 지상의 인간이 영원한 삶을 바라는 존재라면 이것이 곧 종교적 형이상학의 주제가 될 것이나, 일차적으로 세상은 천당과 지옥을 상정할 수 있는 인간의 사유가 전개되는 곳이다. 인간이 천당에 속할 존재라면 그는 어떤 존재일 것이며, 지옥에 떨어질 존재라면 그는 어떤 존재일 것인가? 이 논쟁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으며(VII), 인간 본성의 완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고, 덕을 온전히 닦을(修德)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강생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VIII).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 관심은 세상에 태어난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