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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창간 50돐 기념 특별기획 전국 교구탐방기] 58. 복음화의 산실 북한교회 2. 함흥ㆍ연길ㆍ덕원면속구

특별취재반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12-25 제 1185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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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없는 복귀의 날 고대하며 설움달래
3교구 사제 13명 전국에 흩어져
1945년 교세 한국전체의 116.8%
게재順

①평양교구

②함흥ㆍ연길ㆍ덕원면속구

지금은 갈수없는 땅. 그러나 30년이란 결코 짧지않은 세월동안 땀흘려 씨뿌리고 피흘리며 가꾸어왔던 두고온 상화와 양떼들이 있기에 당장에라도 달려가고픈 그리운 복녁땅. 길이 멀어서도 또 그 길이 험악해서도 아니다. 한맺힌 휴전선이 그어느때 거두어질런지 기약없는 가운데 가슴에이는 아픔과 고향잃은 서러움을 말없이삼킨채 유유히 흐르는 세월이 못내 안타깝기만하다.

북한이 공산화가 되면서 모든성직ㆍ수도자들을 삽시간에 잃고 남은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하로 묻혀버린 북한교회는 메리놀회가 담당한 평양교구와 성베네딕또수도회가 사목을 맡은 함흥ㆍ연길ㆍ덕원면속구로 대별된다. 따라서 북한교회가 당하고있는 수난은 한국 전체교회의 아픔인 동시 특히 이들 두수도회의 크나큰 상처이기도하다.

성 베네딕또회가 1909년 이땅에 처음 들어와 북한에 진출하게된 것은 1920년 8월 서울ㆍ대구교구에 북한에서는 처음으로 설립을 본 원산교구를 맡으면서부터였다. 애당초 이땅의 문화ㆍ교육사업에 전력투구할 목적으로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던 베네딕또회가 북한지역을 사목지로 맡게된 것은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치하에 놓여있어 본래의 사업을 추진할수 없었을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으로인해 인력수급등에도 차질을 빚데됨으로써 새 활로의 개척이 요청된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베네딕또회에 위임된 원산교구는 수도회의 새로운 활동무대인 동시 이후 십수년간 만개(滿開)했던 북한교회의 첫씨앗이기도했다.

1920년 당시 원산교구(교구장=신보니파시오 주교)의 교세는 원산ㆍ내평등 2개본당에 5~6백여 신자다 전부였다 여기에「밖으로는 사도、안으로는 수도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교 문화 교육사업 등에 심혈을 쏟은결과 20년이 지난 1940년에와서는 원산교구만으로는 광대한 함경남북도를 관장할수없어 원산교구가함흥 및 덕원면속구로 분할되면서 발전적인 해체를 보기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연길교구는 당시 국내사정으로 만주 간도지방에 이주해 살고있던 한국인 약50만명과 중국신자들을 사목해야할 급박한 상황에서 태동、1928년 연길대리교구가 설정될때까지 원산교구 관할하에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교세는 용정등 3개본당 1천여 신자외에도 중국인 신자가 1천2백명이나 됐다.

특히 1928년 원산교구와 분리될 당시 연길교구 (교구장=백테오도르 주교)에는 신부 14명이 활동하고있었으며 그후 다시 독일인수사 6명이 파견돼 목공 철공분야의 활동과 더불어 인쇄소도 설립、소년잡지 교리문답서 성가집 등의 교회서적도 출간했다.

이처럼 베네딕또회가 함경남북도와 만주 간도지방에서 선교 교육 문화분야 등에서 보인 눈부신 복음화노력은 여러면에서 수많은 결실을 가져왔으며 무엇보다 그것은 교세면에서도 역력했다.

1945년을 기준으로 볼때 1920년 원산교구 설립당시 2개본당 5~6백여신자가 함흥ㆍ덕원면속구에와서는 본당15개공소 66개에 신자수 1만1천8백44명으로 불어났으며 연길은 3개본당 1천1백신자가 21개본당 2백개공소에 신자수 1만8천5백16명으로 증가됐다. 이들 3개교구의 신자수는 1945년 18만명으로 추상되는 한국전체신자수의 16ㆍ8%에해당되는교세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연길을 선두로 뻗친 공산집단의 마수는 1949년 5월 덕원수도원을 해산시킴으로써 그토록 번창가를 달리던 북한교회를 끝내 지하로 묻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부산시 동래구 오륜동 135의1「성 분도 명상의 집」에 자리잡고있는 함흥덕원ㆍ연길교구청에는 교구장 李 디모테오 몬시뇰만이 화려하고 찬란했던 북한의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언젠가는 복귀할지도 모른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간직한채 외로움과 아픔을 달래고있다.

『3개교구소속 사제13명이 통일이 되면 복귀한다는 조건하에 현재 서울ㆍ대구ㆍ부산 등지에서 일하고 있다』고 애써 웃어보이며 무겁게 입을 연 교구장 李 몬시뇰은 비록 기약은 없으나『그날을 대비해 현재 대신학생 3명을 양성하고 있다』고밝혔다.

실향의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잊지않고 그중 미사때마다 북한에 두고온 양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몬시뇰-말없이 부딛혀가는 세파에 찢겨 하나 둘 사라져가는 월남목자와 실향민들의 한탄과 더불어 겹쳐만가는 주름살이 애절하기만 하다.

<끝>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