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랑과 겸손으로 불안의 와중 헤쳐온, 바오로 6세ㆍ요한 바오로 1세

김영환 신부ㆍ대건신대 신학원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9-30 제 1173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1주기를 맞아 더듬어보는 두 거성의 발자취
전임자의 이미지에 자신을 조합 바오로 6세
사랑과 순명ㆍ겸손과 인내로 복음 선포할 것을 당부
요한 바오로 1세 겸손과 미소로 주의 모습 재현
지난 한해동안 우리는 세계의 정신적인 지도자이며 하느님의 대리자인 두 巨星-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1세를 한 달 남짓 사이(바오로 6세=8월 6일ㆍ요한 바오로 1세=9월 28일)에 잃었다. 인류 역사상 쉽게 지워질 수 없는 큰 발자취를 남기고 간 두 거성의 서거 1주기를 보내며 그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편집자註>

십여 년 간의 로마유학시절을 돌이켜볼 때 가장 인상적인 일은 제2차 바티깐공의회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한지 2천 년, 그 동안에 교회는 20번이나 공의회를 치렀다. 그렇다면 평균 1백년 만에 한 번씩 공의회를 치렀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을 로마 체류기간에 맞이했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그에 못지않게 나의 생애에 큰 사건은 교황성하와의 알현이다. 내가 만나본 교황은 삐오 12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그리고 요한 바오로 1세이다

바오로 성하와 요한 바오로 성하는 귀국 후에 돌아가셨지만 삐오 12세와 요한 23세는 내가 아직 로마에 있을 때 서거하셨다. 교황 성하의 장례식도 2번, 새 교황선거를 본 것도 2번이다. 이 또한 내게는 잊지 못할 사건들이다.

요한 23세가 돌아가시고 바오로 6세가 선출、등극하기까지는 무수한 말들이 오고갔다. 그 중 대표적인 말들의 내용은「차기교황은 누가 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교회사정은 복잡했다.

현대화 물결이 조수처럼 범람하고 마침 제2차 바티깐공의회가 열리고 있던 시기인 만큼 교회쇄신이란 큰 의제가 교회 내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교회는 혼잡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등극한 바오로 6세는 소정의 공의회를 마무리 짓고 그 어떤 교황도 그랫듯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갈바리아의 십자가를 지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와서 바오로 6세의 인품이나 교화와 인류에게 남긴 업적을 낱낱이 열거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기는 하겠으나 그것보다도 전임자(삐오 12세 요한 23세)들의 이미지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하면서 조화를 이룬 것은 교회내의 위대한 업적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귀족적인 삐오 12세의 섬세한 사목방침에 서민적인 요한 23세의 대범한 통치방법을 조화, 완성시킨 것은 바오로 6세의 인품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어떤 의미에서는 삐오 12세와 요한 23세를 한 몸에 지닌분 같은 느낌도 주었다. 다음말은 어느정도 확실성이 있는가는 모르지만 삐오 12세가 그 당시 국무성에 있다가 밀라노 대주교로 발령을 받고 떠나는 바오로 6세를 보고『다음 다음 교황이시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또한 요한 23세는 그 위대한 제2차 바티깐 공의회 개최 결정에 앞서 단 한사람 바오로 6세를 전화로 불러(그 당시 밀라노 대주교였음) 그 뜻을 전했더니 바오로 6세는『저도 꼭 같은 생각을 가졌었읍니다』라고 대답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요한 23세가 서거하시고 공의회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공의회 후에도 교회쇄신(Aoriornamento)의 박차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실로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주제가 교회 현실화(Aggiornamento)였기 때문이다. 요한 23세가 서거한 후 교회나 세상에서는 어떤 혼란을 예상 했었다. 그것은 단 시일내(요한 23세 재임기간 4년)에 교회의 시야는 무서우리 만큼 넓어졌고 모든 문제는 공개토론형식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었었다.

교회내에서는 사제독신문제ㆍ산아제한문제ㆍ이혼가능 문제 등 세기를 두고 왈가왈부했던 문제들이 그때까지만 해도 공개논의하기에는 금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활짝 열어놓고 요한 23세는 서거하셨다. 뒤를 이은 바오로 6세는 그 혼란기를 또박또박 복음적 척도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무리 없이 해결해 나갔다. 교회 밖에서는 타교파와의 대화ㆍ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 등으로 극히 어려운 난관들을 조심스레 헤쳐나간 실로 위대한 교황이었다.

한편 요한 바오로 1세는 우리가 알기에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셨다.

필자는 요한 바오로 1세를 신부때부터 알았다. 요한 바오로 교황이 1958년 베네치아 산간교구의 교구장으로 피임된 후부터 매년 방학 때면 나는 그 교구에가서 1~2주일씩 묵곤 했었다. 내가 57년에 신품을 받을 때 포교지방 서품자를 위한 선물을 내가 받기로 지명이 되었다. 그 교구에서는 매년 새 신부를 위해 사제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을 선물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때 요한 바오로 1세는 본당신부로서 많은 신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았고「온화한 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 웠다. 58년 주교가 된 후에도 조금도 변함없이 온화한 분이었다 항상 만나면 한국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하면서 한국은 순교자의 후예들이라고 칭찬해주었다. 64년 공의회가 진행되던 중 대구 서정길 대주교님과 같이 베네치아교구에 가서 다시 만난적이 있었다. 그때 요한 바오로 1세는 농담이었지만 서 대주교에게『대주교님, 교구에 보좌주교로 써주십시오, 열심히 전교하겠읍니다』라고 웃으며 말씀하던 것을 기억 한다. 요한 바오로 1세는 그 모습이 풍기는 그대로의 성스러운 분이고 온화한 분이셨다. 그의 평생의 못토로<겸손>을 택할만큼 주교때는 교구사제들에게 겸허한 자세로 대하셨다. 또한 요한 바오로 1세가 아직 베네치아 교구장으로 있을때 이런 일이 있었다. 사제서품을 받은지 1년 2개월만에 사제직을 그만두겠다고 한 새 신부에게 요한 바오로 1세는『왜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지를 않았소.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신대로 종의 모습으로 우리인류에게 봉사하셨는데 왜 당신은 봉사하기를 사양하오, 겸손하시오, 그러면 사제직을 이해할꺼요』라고 말하며 같이 우셨다. 그 후 그새신부는 마음을 고쳐먹고 봉쇄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고 겸손했다. 우리가 찾아가면 항상 미소띤 얼굴로 친절하게 맞으며 당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놓으며『이 자리는 본래 내자리가 아니니 신부님이 않으시오』하고 말했다.

이러한 성품의 요한 바오로 1세는 등극하자 겨우 26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근세 교황 중 가장 재임기간이 짧은 분 이었을 것이다. 전 세계의 충격은 컸다. 불과 두달만에 교황을 두번이나 모셔야하는 신자들은 급서에 대해 믿으려하지 않았고 전 세계 각국 원수들도『그런분이야 말로 오늘날과 같은 혼탁한 세상에 빛을 줄 분인데 슬프다』란 공통의 표정들 이었다.

26일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에 세상과 교회에 끼치고 간 요한 바오로 1세의 업적은 대단했다. 어떤 일을 처리하고 사건을 해결해서가 아니라 성자다운 그의 모습과 온화하면서도 그리스도 진리에 대한 강한 의지는 온 세상 사람들 특히 지도층에 있던 각국 위정자들에게는 다시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엄한 판단이라든지 교리에 대한 불변성을 확고히 한 점이라든지 그러면서도 대화를 통한 이해촉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섬세한 마음씀씀이 같은 것은 다른 어떤분도 따를 수 없는 정력적인 얼굴은 복음선포가 교회의 유일한 사명이라는것을 강하게 말해주었다. 현대사회가 가져오는 갖가지 불균형도 성직자들의 영적진전으로 질서가 회복되고 평화와 정의가 구현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요한 바오로 1세는 그의 교도방침에서『우리는 곳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내적인 긴장과 우리자신이 세속의 사고방식이나 혹은 쉽게 갈채를 받는데 매력을 느끼고 빠져드는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의 내적 생활과 외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유일한 사랑의 유대로 결하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짧은 재임기간에 한 갖가지 담화문 같은데서 볼 수 있는 점은『자국내에서 오로지 파괴만을 초래하고 페허와 불행의씨를 뿌리는 무모한 폭력행위에 공동노력으로 대항할 것』을 당부했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운영하는 교회일지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교회에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를 구원해준 교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의 교도방침은 보수ㆍ진보 양측의 지지를 함께 얻은 교황이었다.

특히 빈민과 어린이에 관심이 대단했으며 지금 현시점에서 사목자의 노동자운동의 참여에는 반대(가톨릭시보 1124호 참조)의 입장을 취했다

실로 우리는 위대한 두 교황을 두달도 못돼 잃었다. 그러나 <교황은 항상 있다>라는 속담과 같이 비록 가신분은 우리와 같이 있지 않으나 그 위대한 가르침은 따라야할 것이다 혁신계 운동에 참여한 아버지의아들로서 교황이 되신 그가 풍기는 겸허하고 사랑에 가득찬 언행은 현시점에 처해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 선포에 있고 복음 선포에 있어 폭력적인 언행으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순명 겸손과 인내로서 꾸준히 그리스도의 진리를「내가먼저」실천할 것을 가르쳐주었다.

김영환 신부ㆍ대건신대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