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렇게 말씀을 전했다 - 베버 저「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본 선교의 발자취] 10. 마지막 여행과 이별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7-29 제 1165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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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잃은 이민족 설움 함께 느껴
평양방문、박해시대유물 필름에 담아
외치려던「대한만세」입속서만…
하우고개ㆍ수원ㆍ갓등이ㆍ안성ㆍ미리내ㆍ고주 동남쪽의 주요본당을 돌아 본 베버 초원장은 끝으로 북쪽지방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뿔라치도 원장과 까씨안 신부가 동행했다.

5월 10일 저녁 베버 총 원장 일행은 제물포로 가서 대기 중이던 홍석구(빌헤름) 신부의 안내를 받으며 해주로 가는 기선을 탔다. 이튿날 11시 해주항에 상륙、해주성당을 들러 신천 청계동으로 향했다. 청계동은 비록 조그만 부락이었으나 안중근 일가가 살고 있어 유명하였다.

東學이 번성하던 무렵 안중근의 아버지 안 베드로는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매화동에 있던 홍 신부를 모셔다가 청계동에 본당을 차렸다

또한 청계동은 서울의 베네딕또 회원들이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기 위해 즐겨 찾은 곳이 었다.

뽈라치도와 까씨안 신부가 이번 여행에 나서게 된 것과 그들이 거기서 10여 일을 묵게된 것은 다 이러한 인연에서 였으리라.

청계동에 이어 평양으로 가기위해 베버 총 원장 일행은 안악 매화동을 들러 해변에 이르러 목선을 잡아타고 진남포로 건너가 기차 편으로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에서는 그곳본당 러메르(伊) 신부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성당은 조그만 언덕위에 서있었고 주위에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 교회의 종탑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그들은 교회 뿐 아니라 미국 돈으로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었고 학교만 하더라도 17개나 되었다.

반면 가톨릭은 겨우 5백명의 신자들로 보잘것없었다. 무릇 선교사란 그 나라말을 그 나라사람 처럼 잘 한다 고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무엇보다도 물질적 원조를 통해 포교 사업을 대규모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교회도 박해시대에 익숙된 편협된 길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은 古都이다. 그만큼 고적도 많았고 그중에는 박해시대의 유물도 있었다. 1866년 평양감사는 천주교인을 처형하고 나서 천주교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자 斥邪碑를 세우게 했다.

베버 총원장은 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역사적 기념비를 필름에 담았다. 그리고 급행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6월 24일 베버총원장이 순교자의 피로 적셔진 거룩한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이날 그는 남대문 역에서 전송 나온 이들과 굳은 악수를 나누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올 때 지나쳐 버린 대구를 잠시 둘러보기 위해 대구에서 내려 하루를 묵었다.

대구는 새로 교구가 되고 새로 주교를 맞이한 길이어서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베버 총원장도 지난 6월11일 안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했었다. 대구를 떠나기 몇시간 전 돌연 태풍과 함께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 했다. 여전히 억수로 퍼붓는 폭풍우 가운데 부산역에 내린 베버 총 원장은 사나운 날씨를 바라보며 개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열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기선에 올랐다.

베버 총 원장은 떠날 때 작별인사로「대한만세」를 힘차게 외치리라 별렀건만 그 소리는 입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이제 이민족은 국가를 잃었다. 아마 그것을 다시 찾기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베버 총 원장은 이착하고 성실한 민족을 향해 묵묵히 손을 흔들었다. 마치 그는 이 민족을 장사하는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기분 이었다 <끝>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