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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을 전했다 - 베버 저「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본 선교의 발자취] 7. 수원 객지 여행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6-24 제 1160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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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찾으러온 소년보고 말문이 막혀
전재산 잃은 신자들은 옹기장사로 겨우 연명
한국말의 여러가지 특징에 놀라기도
베버 총원장은 하우고개 본당에서 나흘을 지낸 다음 어느덧 정든 산골짜기와 그곳에 사는 선량한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3월 28일 수원을 향해 여행을 계속했다. 더 없이 뜨거웠던 환영이었기에 그만큼 이별도 어려웠다.

저녁 늦게 수원본당에 도착하니 벌써 어둑어둑하여 그날은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알릭스(한) 신부의 대접은 지극했다. 하지만 워낙 집이 크지 않은지라 어쩔 수 없었다.

신부댁 이라지만 주위 낮은 한옥과 다를 바 없었고 성당도 그 속에 끼어있어서 눈에 띄지가 않았다. 알고 보니 기역(ㄱ)자 모양으로 붙어있는 두 채의 낮은 한옥이 성당이란다. 오른쪽 모퉁이에 제대가 있고 한 채는 남자용이고 또 한 채는 여자용 이어서 한국관습이 요구되는 남녀의 구별이 저절로 되어있었다. 수원본당의 교우는 1천5백명. 그러나 읍내에 사는 교우는 3백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베버 신부는 시내관광에 나섰다. 그날은 마침 수원장날이었다. 혼잡한 장마당을 벗어나 한국에서 보기 드문 묵직한 다리를 건너니 거기에 성당에서 경영하는 학교가 있었다.

베버 신부는 수원에 이어 3월 30일 이웃 갓등이를 찾았다. 환영인파는 좀처럼 줄어들 줄을 몰랐고、신부댁은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꽉차있었다. 그래서 베버 신부는 이 기회에 한국말의 여러 가지 특징을 물었다. 한국 사람은「먹다」란 말을 여러 뜻으로 쓴다. 밥 먹다ㆍ물먹다ㆍ담배 먹다ㆍ귀먹다ㆍ악한 마음먹다ㆍ분한 마음먹다ㆍ성 먹다ㆍ한 살 먹다 등등、「먹다」는 한 없이 적용된다. 그만큼 낱말과 숙어가 많고 표현방법이 매우 풍부하고 보니 한국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4월 3일 오후 베버 신부는 박해시대의 유물인 옹기촌을 찾아 나섰다. 갓등이에서 한 시간 반을 걸으면 정말이 나타난다.

여기에 박해 때 피신해온 1백50명의 교우들이 함께 모여살고 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옹기점을 하다가 결국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한다. 전 재산을 잃고 나서 시작한 옹기정은 그들의 생계를 간신히 이어가게 했다. 한곳에서 쫓기면 다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를 가든 그들은 더 좋은 흙과 더 많은 장작을 찾아냈다. 그들은 옹기를 팔기위해 자주 도시로 나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은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신부를 방문하고 성사를 받았다. 옹기장사는 그들을 박해에서 구출하였고 동시에 그들을 굶어죽지 않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까지 이 직업에 충실히 머무르고 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다. 그러나 천주께 대한 굳은 신앙과 불같은 사랑에 있어서만은 가장 큰 부자이다.

「갓등이」에서 일주간의 일정을 끝내고 베버 신부는 4월 3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밤늦게 한 소년이 수도원을 찾아왔다.「갓등이」에서온 안드레아라는 소년으로、사연인즉 자기와 자기친구의 사진을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베버 신부는 어이가 없었다. 시장의 사진쟁이처럼 반시간 만에 사진을 만들어낼 수도 없거니와 그 많은 원판 중에서 그것만을 골라내 현상할 수도 없었다.

소년의 인내심에 호소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부득이 베버 신부는 원판을 지키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소년이 그의 호기심을 자제하지 못할 때 결국 자신에게 실망을 안겨줄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