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요한 바오로 2세 첫 회칙 - 인류의 구원자] 9.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6-10 제 1158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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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신적인 진리의 주체
인간소명 결정 요소는 진리
성체성사는 십자가상신비 재현
새 존재의 완전한 표시-성체성사
19、敎會는 眞理애 대해 책임이 있다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교회는 신적진리(神的眞理)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회적주체(社會的主體)로 나타난다. 우리는『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말이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깊이 감동한다.

우리 스승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계시된 진리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 이 진리는 원래하느님의「소유(所有)이다. 따라서『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이신 스승마저도 예언자요 교사로서 이 진리를 전수(傳授)하실 때에는 당신이 이 진리의 신적인 원천에 온전히 충실하게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셔야 겠다는 필요를 느끼셨다. 교회가 이 진리를 가르칠 때에도 고백할 때에도 같은 충실이 교회신앙의 본질 적품성이 되어야한다. 신앙은 인간정신에 주부(注賦)된 복수한 초자연덕(超自然德)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계시된 말씀에 대한응답으로서 하느님의 지식에 참여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신앙을 고백하고 가르칠 때에는 신적진리를 엄밀히 고수하여야 하며 그것을『이성(理性)과 조화되는 순종』의 생활태도로 재표현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적진리에 대한 이 충실을 고려하셔서 교회에 진리이신 성령의 특별한 가호를 언약하셨고 그 진리를 전수하고 가르치라는 명을 내리신 이들에게는 제1차「바티깐」공의회가 명백히 정의(定義)하고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재 반복한 바와 같이 무류성(無謬性)의 선물을 주셨으며 나아가서 하느님의 전 백성에게 특수한 신앙심을 채워주셨다

그런즉 우리도 예언자 그리스도의 이 使命을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이 사명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안에서 신적진리에 봉사하고 있다. 그 진리에 대해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가장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힘씀을 뜻하니、이는 그 진리의 구원능력과 광채와 심원함과 아울러 단순함을 우리가 속속들이 가까이하고、남들도 가까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진리에 대한 이 사랑과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 염원은 반드시 손을 맞잡게되니 이것은 교회내의 성인(聖人)들의 역사에 의해서 입증 된다.

성인들은 신적진리를 빛나게 하고 하느님의 실재자체에 가까와지게 만드는 참 빛을 가장 환하게 받은 분들이다. 그분들은 경외(敬畏)와 사랑을 갖고 이 진리에 가까이 가기 때문이니 그 사랑은 먼저 신적진리의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고 그다음은 복음서에 실려 있는 그분의 인간적 표현과 전통과 신학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다

오늘에 와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아직도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신학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명에 창조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신학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었고 지금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신적진리에 봉사하는 사람들로서 그 진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위한 연구와 노력에 종사할 때에는 자기들의 봉사가 교회 내에서 갖는 의미 즉「신앙의 이해」라는 개념을 간과할 수 없다. 신앙의 이해라는 이 개념은 말하자면 이중 기능을 한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에 따라『믿으려면 이해하라、이해하려면 믿으라』라는 것이다. 신앙의 이해가 올바르게 행사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신학자들이 교도권(敎導權)은 교회 내에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교계적상통(敎階的相通)의 유대로 결합된 주교들에게 위임되어 있다)에 봉사하고자 노력할 때 신학자들이 가르침과 사목활동에 대한배려에 응할 때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사도적 투신에 응할 때이다.

이전시대처럼 아니 이전 시대보다 더 신학자들과 교회의 모든 지식인들은 오늘날 신앙을 학문 및 지혜와 합일시키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교회학자 성 알베르또 기념일의 전례에 나오는 기도문대로 신앙 과학식 및 지혜가 상호 융합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학문과 방법론 세계와 인간에 관한 지식의 성취에 있어서 진전이 놀랍기 때문에 오늘날 이 과업은 참으로 증대해졌다. 이것은 제2차「바티깐」공의회가신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지적한 철학뿐만 아니라 정밀과학과 인문과학에도 해당 한다.

인간 지식의 이 분야는 날로 광범해지고 세분화되고 있는데、이 분야에도 신앙이 깊이 침투되어 계시된 신비의 원대함을 과시하고 진리의 이해를 향해 계도하여야 하였으니 무릇 진리도 하느님에게 최고원천을 두기 때문이다.

이 방면에서 이루어진 엄청난 작업으로 미루러 방법론상의 다원주의(多元主義)를 고려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고 심지어 바람직하다고는 하지만、그 작업이 목적으로 삼는 신앙과 도덕의 가르침에 있어서의 근본적 일치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신학은 교도권과 긴밀히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신학자는 그리스도께서『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고하신 말씀의 의도를 각별히 의식하여야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도 신학을 단순히 자기 개인 사상의 집합으로 만들 수는 없으며、모든 이는 교회가 책임지고 있는、진리를 가르치는 사명에 자신이 밀접히 결속되어 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예언직(豫言職)에의 참여는 교회전체의 생활을 그 근본차원에서 성격 짓는다. 이 직책에 대한 특별한 참여는 교회사독자들에 속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고 부단하게 또 다양하게 선포하고 전수한다. 이 가르침은 그 宣敎的 측면에서나 通常的 측면에서나、하느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주의에 모이도록 돕고 성체성사의 참여를 준비시키며 성사생활(聖事生活)의 길을 가리켜 준다.

1977년의 주교 시노드는 현대세계의 교리교육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시노드의 결의와 경험과 제안은(시노드 참석자들이 채택한 건의안에 입각하여) 머지않아 교황 특별문서에서 밝혀질 것이다. 확실히 교리 교육은 교회활동의 영속적이고도 근본적인 형태이다. (교회의 예언적 카리스마ㆍ곧) 증언하고 가르치는 일이 한데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사제들을 두고 이 말을 하지만、자기의 신적 스승을 위하는 사랑으로 교리교육 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남녀수도자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이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과 사도적 책임을 표현하고 있는 무수한 평신도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걸음 나아가서、가정교리교육 즉 부모에 의한 자녀의 교리교육이라는 기본 영역에서 시작하여 여러 영역에서 여러 형태로 실시되고 있는 교리교육이 하느님의 백성전체가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명확한 증거가 되도록 점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신적진리에 대한 교리의 책임을 모든 이가 갖가지 방법으로 점차 나누어지도록 해야 하겠다. 이 시점에서 각계의 절문가들、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대표하는 이들、의사ㆍ범률가ㆍ예술가와 기술자ㆍ전문분야와 직급이 다른 교사들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그들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예언사명과 신적진리에 대한 봉사에 자기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니、소득분야가 어디든지간에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교육하고 사랑과 정의에 숙성해지도록 가르침으로써 다른 어떤 방도보다도 진리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갖고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진리에 대한 책임감 이야말로 교회와 각인간이 만나는 중요지점(地點)의 하나이며、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소명을 결정하는 기본 요구사항의 하나이기도하다. 현대교회、진리에 대한책임감에 인도되는 교회는(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를 보낸다…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로 부터 친히 오는 예언적 사명에 관한)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끝까지 충실하여야 한다.

20、聖體聖事와 告白聖事

구속의 신비、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교회는 말씀과 진리의 봉사에 충실함으로써 스승의 복음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희망과 사랑에 찬 순종으로 그리스도의 구속행위의 능력도 함께 나눈다.

이것이 성사적 형태로 특히 성체성사로 표현되고 간직된다. 성체성사는 성사생활의 中心이며 頂點이며 그 성사를 통해 각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의 신비로 비롯된 구속의 구원능력을 받게 된다. 사도께서도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묻혔으며 그리하여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고 가르치신다. 이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교회와 각 그리스도신자의 성사생활전부가 왜 성체성사로 정점과 충만에 이르는지 그 까닭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성사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아버지께 바치신 자기희생의 신비가 계속해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 희생 제사를 아버지께서는 받아주시고「죽기까지 순종하신」당신 아드님의 전적인 자기증여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의 자부적(慈父的) 선물을 주셨으니 그것이 부활에 의한 불사불멸하는 새 생명의 보장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태초부터 생명의 첫째원천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육체가 입은 영광과 관련된 그 새 생명은 인류에게 보장된 새로운 선물을 이루어주는 표지(標識)가 되었다

이 선물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누리고 계시고 당신 아드님에게 주시는 그 神的 생명이(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일된 모든 인간들에게 베풀어진다.

성체성사는 이 합일을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가장 완전한 성사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지상에 계시고 또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전구(傳求)하시는 그리스도와 합일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일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희생제사의 구속적 행위를 통해서이니、그 희생 제사를 통해서 그분이 우리를 구속、즉『갑을 치르고 우리 몸을 사셨다』우리 구속의「값」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매기시는 가치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우리의 존엄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다

왜냐하면『하느님의 자녀』、양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비슷해져서『한 왕국이 되고 사제가 되었으며』『왕의 사제직』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신 아드님이자 참 사람이 신분에 의해서 한번이자 마지막으로 인간과 세계를 아버지께 되돌아가게 만든 유일무이하고 돌이킬 수 없는 회복(回復)을 우리도 참여하게 되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새 존재가 가장완전하게 표시되는 성사이며、우리각자가 하느님과 의자녀 다운 화해의 결실을 가까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친히 증거하시는 성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성취하셨고 교회의 봉사직무를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시는 하느님과의 자녀다운 화해의 결실을 우리가-구속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가까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부단히 또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영(靈)에 증언하신다.

성체성사가 교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근본진리이니、교의상의 진리일 뿐만 아니라 생활의 진리이기도 한다. 성체성사가 건설하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의 참다운 공동체이며 신자들의 집회이며 주님의 사도들과 첫 번 제자들이 나누던 일치의 표적을 그대로 간직하는 집회이다.

성체성사는 이 공동체와 일치를 늘 새롭게 건설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근본으로 하여 이 공동체를 늘 건설하고 당시 환생시킨다. 왜냐하면 그 희생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대가(代價)인 십자가상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어느 면에서 주님의 몸과 피의 신비 자체를 다룬다. 그것은 이 의식에 쓰이는 말로도 알수 있으니、제도에 의해서 교회의 이 봉사직무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하여 성체성사를 끊임없이 거행하게 되었다.

교회는 성체성사에 의해서 살아간다. 이 성사의 충만함에 의해서 살아가다.

이 성사의 놀라운 의미와 내용에 관해서는 아주 옛적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교회교도권에 의해서 누누히 피력되어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가르침이 신학자들의 정확한 지식과 신앙이 깊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인간들과、수덕가 들과 신비가 들에 힘입어서 성체신비에 온전히 충실하게 표명은 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겉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체성사가 참으로 무엇인지、그것으로 무엇이 표명되는지、무엇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도 파악할 수도 없으려니와 말로 옮기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체성사는 형언할 수 없는 비사(秘事)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