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요한 바오로 2세 첫 회칙 - 인류의 구원자] 8.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6-03 제 1157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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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교회의 사명과 인간의 운명
교회는 주와 인류와의 일치의 도구
그리스도의 눈으로 인간을 보아야
현대는 유난히도 성령에 주린시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성서와 교부(敎父)들의 전통전체를 근거로 하여 언명한대로 그리스도의 이 신비체(神秘體)가「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 신비체 내의 각 사람이 자기내부에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길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과 그의 현실문제、그의 희망과 고뇌、그의 성공과 실패를 돌이켜봄으로써 몸이요 유기체이며 사회단위인 교회로 하여금 똑같이 인적인 영향력들、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고도성장의 빛과 힘을 감지하게 만든다. 또 이것이 바로교회가 그 생명을 살아가는 명분(名分)이기도 하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뿐이니 교회의 배필이시요 주께서 교회에 주신 그 생명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의신비로 교회를 당신에게 일치시켰음으로 교회는 모든 사람과 단단히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인간과의 이 일치는 그자체가 하나의 신비이다 그 신비에서『신인간(新人間)』、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기로 된 인간、그리스도를 통해서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게 새로 창조된 인간』이 탄생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인간과의 일치는 하나의 능력이며 능력의 원천이니、성요한이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말씀>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전(능력)을 주셨다』고 예리하게 주장한 말 그대로다. 인간은 새 생명의 원천인 그 능력에 의하여 내부에서부터 변혁된다. 그 새 생명은 사라지거나 살게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언약하신바있고 당신의 영원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때가 찼을 때』강생하시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신 그 생명이야말로 인간의 소명(召命)의 최종적 실현이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운명」의 실현이다. 이「신적운명(神的運命)」은 시간의 세계 속에서 전개되는「인간적 운명」의 온갖 수수께끼와 불가사의와 우역곡절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앞으로 뻗어나간다.

그런데 생명이 제아무리 풍부한 것일지라도 조만간에 이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죽음의 경계선、인간육체의 파괴라는 목적지로 귀착하는데 비해서 우리도 그 목적지 뒤에 그리스도를 뵙는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물질을 예속 시키고 있고 또한 보이는 모든 피조물과 인간이 함께 겪어야하는 그 필연(必然)을 향해 그 길을 갈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부활의 희망이 싹텄고…장차 불만의 생명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구원자께서『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는 구절에 간직해 두신 진리의 언어들보다 깊이 헤아리고자 노력해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겉으로야 어떻든 이 말씀은 인간에 대한 최고의 긍적、영(靈)에 의해서 육체에 생명이 부여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교회는 바로 이 실재들을 삶에 옮기고 있다. 교회는 인간에 대한이 진리에 의거하여 산다.

이 진리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성(時間性)의 테두리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며、아울러 이 시간성의 차원 내에서 인간의 생명과 인간정신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물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을 수 있게 해준다.『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님 안에 쉬기까지는/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읍니다.』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에 담겨진 그칠 줄 모르는 불안정이 거기에 표명되어있다.

이 건설적인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가장 인간다운 충동이 고동치고 맥박을 뛰게 하느니 진기를 쫓는 탐구、선을 향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갈증、자유에 대한 향수(鄕愁)、양심의 소리 등이 그것이다.「그리스도의 눈」을 갖고 인간을 탐구할 때 교회는 자기가 위대한 보물의 수직자(守直者)라는 각성이 갈수록 더해지며 그 보물을 함부로 써버려서는 안될뿐더러 부단히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으로 예수께서도『나와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이다』고 말씀하신바 있다. 인간성(人間性)의 이 보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형언할 수 없는 시비에 의해서와 하느님의 외아들을 통해서(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녀로 입양(入養)하시는 은총에 의해서 더욱 부요해졌다.

그런데 인간성의 이 보물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내부적으로 교회를 단결시키는 강력한 힘이요 교회의 모든 활동에 의의를 부여하는 힘이다.

이 힘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령께 일치한다. 성령은 구세주께서 언약하셨고 끊임없이 나누어주시며 오순절에 표면에 나타난 성령의 강림도 끊임없이 계속 된다. 그리하여 영(靈)의 능력、영(靈)의 선물、성령의 열매가 인간들에게 밝게 나타난다.

오늘의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더한 열심과 경건과 고집으로『오소서 성령이여!』하는 외침을 거듭하고 있는것 같다. 오소서! 오소서!『더러운 것 씻으소서 마른 것 물주소서 병든 것 씻우소서 굳은 것 굽히시고 찬 것을 덥히시고 빗끈 것 잡으소서』

성령께 드리는 이 간청은 영(靈)을 모셔 들이려는 뜻이 있는 것으로서 우리시대의 모든 유물론(唯物論)들에 대한 답변이라 하겠다.

인간마음에 형태의 불만족을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이들 유물론이다. 인간청이 여러 방면에서 이미 성취되고 있고 여러 양상으로 이미 결실을 거두고 있다. 교회만 이 간청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영적인 것에 대한「필요」는 교회의 눈에 보이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토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최근의 공의회가 극구 강조한 교회에 관한 진리로도 확인된바 있지 않은가?

공의회도「교회에 관한 교외헌장」에서『교회는 성사(聖事)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標識)요 도구(道具)인 것이다』고 가르쳤다. 영(靈)을 모셔 들이기 위해 영(靈)께 올리는 이기원(祈願)은 구속의 신비라는 위대한 세계 속으로 항구하게 자신을 몰입시키는 것이며 구속의 신비 속에서 아버지와 일치하시고 각 사람과 일치하여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을 나누어 주시는데 우리 내심에 아드님의 감정을 심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로 항하게 만드시는 분은 바로 이영(靈)이시다

현대는 유난히 靈에 주린 시대이다. 이 시대가 정의ㆍ평화ㆍ사랑ㆍ선ㆍ용기ㆍ책임 그리고 인간존엄성에 주린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시대의 교회가 구속의 신비에 시선을 집중하고 그 신비 주위에 모여 거기서 자기사명을 다하는데 불가결한 빛과 힘을 찾아내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만일 인간이 교회의 일상생활의 표준이 되는 길이라면 교회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그 품위와 은총과 영광을 받기로 되어있는 인간운명의 존엄성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마땅하다.『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교회는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주 그리스도께 부름 받았다.

따라서 교회가 위에 말한 모든 사실을 늘 새롭게 반성함으로써 갈수록 의식이 뚜렷한 신앙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갈수록 굳건한 사랑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에 대한 봉사에 더욱 적합해진다.

교회는 교회의 스승이시고 구세주 주이신 분에게 딸린「삼중직분(三重職分)」을 나누어 짐으로써 이 봉사직무를 수행한다. 이 가르침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지만 제2차「바티깐」공의회에 의해서 완전히 부각되어 교회생활을 크게 이롭게 만든 가르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삼중직분、사제(司祭)요 예언자(豫言者) 요왕(玉)으로서의 직분에 참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의 사회이며 공동체에서 봉사의 대상이 무엇인지 보다 더 의식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우리각자가 교회의 이사명과 봉사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