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요한 바오로 2세 첫 회칙 - 인류의 구원자] 6. Ⅲ 구속받은 인간과 현대세계 내의 인간상황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5-20 제 1155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인간다운 삶이 곧 교회의 관심사
교회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사랑
윤리질서와 괴리된 인간상황
유물론적 문명 인간을 노예화
교회는 만인이 그리스도를 만나뵙게하는 하나의 목적에로 봉사해야
13, 그리스도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켰다.

끊임없이 또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류가족의 경험에 비추어 예수그리스도의 신비를 통찰할 때에 우리는 현대의 교회가 따라가야 할 이 모든 길들의 저변에 또 하나의 길이 있다고 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명명백백하게 깨닫는다. 이 길은 수세기의 시험을 거친 길이며 미래의 길이 기도하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이 길을 분명히 가리켜 보이셨다. 공의회의 가르침에 의하면「성자께서는 사실 당신의 화신(化身)으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 것이다」그러므로 교회는 이 일치를 이룩하고 끊임없이 갱신하는 일을 교회의 표본과업으로 여긴다. 교회는 다만 하나의 목적에 봉사하고자한다.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生의 여정(旅程)을 함께 걸으시면서 강생과 구속의 신비에 담겨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리의 힘과 그 진리에서 비추어 나오는 사랑의 힘을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증가일로에 있는 역사 과정들이 현시점에서 각양각색의 체제들과 이념적인 세계관과 사회조직들의 영역에 결과들을 현저하게 빚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표면상으로 그리스도께서 부재(不在) 하시는 것 같고 교회의 현존과 제도적 활동이 온갖 제약을 받는 것 같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어느 면에서 전혀 새롭게 현존하시게 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진리와 사랑의 힘을 갖고 현존 하시게 된다. 지상에서의 그분의 생애가 비록 짧았고 더구나 그분의 공적활동은 더욱 짧았지만 그 진리와 사랑이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으로 그분에게서 충만하게 표출(表出)된바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가 따라야할 한길이시다. 그분은「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이시다. 그분은「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이시며 각 사람에게 도달하는 길이시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람에게 이르는 이 길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각개 인간과 일치시키시는 이 길에서 교회를 멈추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이 길은 인간의 현세적 복지와 영원한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보아서도 교회는 인간의 참다운 복지에 보탬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나 무감각할 수 없으며 더욱이나 인간의 복지를 위협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모른체 할 수 없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는 여러 문헌에서, 모든 면에서 세계를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에 더욱 부합시키어 인간의생활을「보다 인간답게 만드는」일에 대한 교회의 근본적 관심을 여러 가지로 표명했었다. 이것은 만인의 착한목자이신 그리스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나오듯이, 이관심의 명분으로 교회의 절대로 정치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아무런 정치체제에서도 얽매이지 않는 동시에 인격의 초월성의 표지(標識)요 수호자인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자체 그의 진리 전체를 본 인간, 그의 위대함을 그대로 본 인간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추상적」인간이 아니고 현실적이고「구체적」이며「역사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인간 각자이다. 왜냐하면 개개인간이 구속의 신비에 포함되며 그리스도께서 이 신비를 통해서 당신과 영원히 일치 시키신 것은 개개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각자는 자기어머니의 모태에 잉태되어 세상에 온다. 그와 똑같이 인간각자는 구속의 신비에 의해서 교회의 염려에 맡겨져 있다. 교회의 염려는 전인(全人)을 대상으로 하며 전혀 특수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기울어진다. 교회의 보살핌의 대상은 유일무이하고 반복 될 수 없는 인간실재,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인간이다. 공의회가 이 유사성을 논하면서 인간을 가리켜「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를」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원하시고」하느님이「선택하신」인간, 은총과 영광에로 부름 받고, 예정된 인간은 다름 아닌 이「각」인간「가장 구체적인」인간, 「가장 현실적인」인간이다. 이 인간은 온갖 신비가 가득 차 있으며 그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고 있다. 지구상의 40억 인간 개개인이 자기 모친의 태중에 수태되는 순간부터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

14, 교회로서는 모든 길이 인간에게로 통한다.

교회는 인간을 저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의「운명」즉 그의 선택과 불리움, 출생과 죽음, 구원 또는 멸망이 그리스도와 뗄래야 뗄 수없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지구성에 사는 인간작자이다. 이 지구는 창조주께서 남자와 여자에게「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 하여라」고 말씀하시며 첫 인간에게 주신 땅이다. 각 인간은 그가 타고난 것, 그가 행하는 것, 그의 지성과 의지, 그의 양심과 마음에 있어서 전혀 일회적(一回的)인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의「인격체」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생명의역사가 있고, 가장 중요한 자기만의 영혼이 역사가 있다.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정신이 개방되어있고 육체와 시간안의 존재로서 보는 여러가지 다른 필요들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기만의 것인 이 개인적 역사를 기록하되 지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기를 타인들과 이어주는 수많은 유대·접촉·상황·사회적 구조들을 거치면서 이 역사를 기록해간다.

인간은 그의 실존에 관한진리, 그의 인격적 존재와 그의 공동체와 그의 사회적 존재에 관한 진리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의 사회적 존재라면 그의 고유한 가정의 영역, 사회와 대단히 다양한 맥락들의 영역, 자기나라가 민족 때로는 종족에 국한된 영역, 나아가서 全人들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인간이다. 이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기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하는 첫째가는 길이다. 「인간은 교회가 따라 걸어야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 가는 길이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가 염두에 둔 것은 다름 아닌 이 인간 생의 온갖 진리와 양심과 끊임없이 죄로 기울어지는 性向과 동시에 진·선·미 및 정의와 사랑에로 향하는 부단한 염원을 갖춘 이 인간이었다. 공의회는 현대세계에 처한 인간의 상황을 개괄함에 있어서 항상 이 상황의 외면적요소들에서 출발하여 인간성 안에 깃들어 있는 진리에 도달했다. 과연 인간내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욕망에 있어 제한을 받지 않을 뿐더러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로 불리웠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한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언제나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구나 인간은 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하고 원하는 일은 행치 않는 수도 드물지 않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미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많은 불화도 생겨나는 것이다.

이 인간이 교회가 따라 걸어야하는 길이다. 어느 면에서 교회가 따라 걸어야하는 다른 모든 길들의 바탕이 되는 길이다 인간은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아무런 예외도 없이 누구나, 심지어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에게 일치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각자에게 또 누구에게나「빛과 힘을 주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다」

이 인간이 교회가 따라 걸어야할 길, 교회의 일상생활과 체험, 교회의 사명과 노고를 기울여야할 길이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교회가 인간의 가능성들을 감지하여 본연의 취지에로 돌이키고 또 이를 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인간에 대한 위협들「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고」현세생활의 모든 요소가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에 맞갖게 만들려는 노력에 상반되어 보이는 모든 것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그 과정에 상반된 모든 것을 감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 현대인이 두려워하는 것

그러므로 제2차 바티깐공의회가 통찰력과 권위를 가지고 그려낸 묘사를 우리기억에 생생히 보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것을「시대의 표징과 부단히 변화하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의 요청에 적용해보고자 시도할 것이다

현대의 인간은 어느 때보다 자기가 만들어낸 것으로 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듯 하다 즉 인간의 손, 나아가서는 인간지성과 의지의 성향이 만들어낸 작업의 결과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인간의 이 다양한 활동이 빚어내는 산물이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면을 벗어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도대체 너무도 빨리 그리고 때로는 도저히 예측 못할 방식으로「소외」를 빚어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간접적인 결과를 통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에게 역행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거스리고 있거나 거스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것이 광범위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대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현재적 드라마에서 본장(本章)을 차지하는 현상인 듯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갈수록 두려움 속에 살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이-물론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지만 그 일부, 특히 인간의 재능과 창의성을 각별히 쏟은 것들- 이 인간자신에게 철저하게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자기파멸을 몰고 오는 수단이자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두려워한다. 그때의 파멸에 비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시시해질 정도이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태초부터 땅을 복종시키라고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어떻게 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어떻게 해서 인간에게 반역하게 되는가? 어떻게 해서 그 능력이 불안과 의식적·무의식적 공표와 위협이 되어 현대 인간가족 전체에 침부하고 갖가지 측면에서 자태를 나타내게 되는가?

인간이 만들 것으로부터 인간이 위협받는 이 상태는 여러 방면으로 또 여러 가지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위성인 지구의 개발이 합리적이고 솔직한 계획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점차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울러 산업상의 목적뿐만 아니고 군사상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구의 개발, 장기적이고 진정 인본주의적인 계획의 범위를 이탈한 기술공학의 통제 불가능한 발전이 인간의 자연환경을 흔히 위협하고,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며,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있다. 인간은 자연환경을 놓고서 즉각적 이용과 소비에 유익한 것 말고는 다른 의미를 발견 못하는듯하다. 그러나 창조주의 뜻은 인간이 현명하고 기품 있는「주인」(主人)이자「보호자」 (保護者)로서 자연과 통교(通交)하는 것이지「착취나」나「파괴자」로서 자연을 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공학의 발달과 기술공학의 향상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문명의 발달은 윤리 및 도덕의 조화 있는 발달을 아울러 요청 한다 현시점에서는 불행하게도 후자의 발달이 항상 뒤에 처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놀라운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 진보가 크게 불안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 인간 진보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이는 참다운 표지, 창세기 첫머리에 인간의 창조를 논하는 대목에서부터 우리에게 창조적 씨앗처럼 계시된바 있는 그 표지를 보기 힘든다는데 이유가 있다.

불안의 첫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 인간을 장본인이며 주동자로하고 있는 이진보가 지상의 인간생활을 모든 면에서「보다 인간답게」만들고 있는가?

그것이 인간생활을 더욱「인간에게 가치 있는」생활로 만드는가? 여러 면에서 사실 그렇다고 하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이질문은 다시 원상으로 되돌아와 버린다.

이 진보의 맥락에서 보건대 인간이 인간으로서 정말 더 좋아지는가? 말하자면 영성적으로 더욱 성숙하며 자기인간성의 품위를 더욱 의식하여 보다 책임감이 생기며 타인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빈궁하고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을 열며, 주려 마음과 모든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더 생기는가?

이 질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 신자들이 스스로 제기해야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인간의 문제에 전반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이 만인에 의해서, 그중에서도 현대개발과 진보에 능동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사회계층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어야 한다. 이 진보의 과정을 관찰하거나 참여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저 도취감에 빠져서도 안 되고 우리의 성과를 두고 일방적인 열광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오히려 절대적 솔직과 객관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현대와 미래에 있어서의 인간의 상황에 관한 근본의문들을 스스로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달성한 모든 성과와 미래에 기술 공찰에 기대하는 계획들이 과연 인간의 윤리적·영성적 진보와 부합하는가? 이 과정에서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서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퇴보하고 그의 인간성에 있어서 타락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들 안에 그리고「인간의 세계」-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이다-내부에서 과연 선이 악을 제압하고 있는가? 인간내부에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사회적 사랑이 증가하고, 타인들-각 인간, 국가 및 민족-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증가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각종 이기심, 진정한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국수주의, 자기의 합법적 권리와 공적인 한계를 넘어서까지 타자들을 지배하려는 악습, 물질적 진보 전체를 장악하려는 악습, 물질적 진보전체를 장악하려는 악습, 타자들을 지배하고 이러저러한 제국주의(帝國主義)를 비호하려는 배타적인 목적에서 생산기술을 장악하려는 성벽 등이 휭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교회가 스스로 제기하여야할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들은 현재 지구상에 사는 수십억 인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명백하게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개발과 진보라는 주제는 모든 사람의 입술에 모든 신문의 기고란에 현대세계의 모든 언어로 나오는 간행물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이 주제는 긍정적이고 확실한 요소들만이 아니고 의혹과 괴로운 불안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후자가 전자보다 덜 심각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사실은 인간지식의 변증법적 성격과 들어맞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그의 인간성을 위한, 지구상의 인류의 미래를 위한 염려가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요청과 부합한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영감을 받는 교회는 인간을 위한, 그의 인간성을 위한, 지구상의 인류의 미래를 위한, 따라서 개발과 진보의 전체과정을 위한 염려의 원리원칙을 복음이 증언하는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낸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이 염려를 부단히 증진시키고자하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표징들에 입각하여 현대세계에 처한 인간의 상황을 해독하기에 힘쓴다.

16, 진보냐 위협이냐?

그러므로 우리시대가 우리 세대의 시대가, 그리스도교 연대로 2천년의 종막이 다가오는 이시대가 위대한 진보의 시대라고 한다면 인간에게는 여러 양태로 위협의 시대로 보이기도 한다. 교회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위협에 관해서 발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 문제를 두고 그들과 항상 대화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세계의 인간의 상항은 참으로 윤리질서의 객관적 요구에서 멀리 떨어진 듯하며 정의의 요구 심지어는 사회적 사랑의 요청에서 멀리 떨어진 듯하다. 우리는 여기서 창조주께서 땅을 사람에게 맡기실 순간에 그에게 건네주시니 최초의 메시지 곧「땅을 정복 하여라」는 말씀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최초의 메시지는 구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신비를 통하여 확인하신바 인간의「왕직(王職)」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왕다운 직분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에 관해서 논한 아름다운 장(章)에 표현이 되어있다.

이「왕직」, 가견적 세계위에 행사하는 인간의 주권(主權)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사명으로 부여하신 것으로서 그 본질적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하면 기술(技術)에 대한 도의(道義)의 위선·사물(事物)에 대한 인격(人格)의 우선 그리고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현시대의 진보의 모든 단계들이 주의 깊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 진보의 각 단계가 이 관점에서 일일치·투시(透視) 되어야한다. 문제는 인격들의 진보발달이지 단순히 사람이 쓸수 있는 것이 증가가 아니다. 어느 현대 철학자가 말한바있고 공의회가 주장한바 있거니와 이것은「무엇을 가졌느냐는 문제가 아니고「어떤 인간이냐」는 문제이다.

사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엄청난 진전을 가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맥(脈)들이 끊길 위험이 현실적으로 피부에 느껴진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인간이 자기의 인간성을 세계에 예속시키게 버려두거나 공동체 생활의 조직전체를 통해서나 생산제도를 통해서나 사회홍보수단의 압력을 통해서나 여러 방도로 자신을 조종(操縱)-비록 흔히는 그 조종이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에 맡겨버릴 위험이 대두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유기(遺棄)할 수도 없으려니와 자기에게 속하는 가견적 세계 내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위치를 유기할 수도 없다 그는 사물의 노예, 경제체제의 노예, 생산의 노예, 자기 손으로 만든 사물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순전히 유물론적인 문명은 인간을 그러한 노예처지에로 몰락시키고 만다. 때로는 이것이 그 선구자들의 의도나 전제사항에 역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결국 그렇게 구결 된다. 현시점에서 인간에 대한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이 문제에 조장을 둔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누구냐는 질문에 추상적인 답변을 내놓을 그런 문제가 아니다. 생명과 문명의 활력(活力) 전체가 달린 문제이다. 일상생활의 갖가지 항의적 노력의 의미가 걸린 문제이며, 수많은 문명계획, 정치계획, 경제계획, 사회계획 그 밖의 많은 계획의 대전제들이 좌우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감히 현대세계에 처한 인간의 상황이 윤리질서의 객관적 요구에서 멀고 정의의 요청과 멀며 심지어 사회적 사랑과도 멀다고 말한 것은 잘 아는 사실들과 대조(對照)하여 그것이 확인되었기이다.

이것은 역대 교황들의 문서와 공의회와 시노드의 문서 등 여러 기회에 이미 지적된 것들이다. 확실히 오늘날 인간의 상황은 획일적이 아니고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역사에 원인이 있지만 그 도덕적 결과는 강력한 것이다. 실상 누구나 소비문명(消費文明)의 像과 친숙해져있다. 소비문명이란 인간에게나 전 사회에 필수적인 재화의 어떤 잉여분(剩餘分)-우리가 말하는 것은 부유한 고도 선진사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에 의해서 성립이 된다. 그 동안 다른 사회들-적어도 상당히 큰 부분-은 기아에 시달리고 무수한 인간들이 매일 같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한 무리는 가면 갈수록 자유의 상당한 남용-이남용은 도덕의 통제를 받지 않는 소비적 태도와 결속된 것임이 분명하다-올 하고 그 대신 다른 이들은 그 무리에 의해서 자유의 제한을 받는 그야말로 현저한 결핍에 시달리고 극도의 비참과 빈곤의 처지에 몰려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현상과 현격한 대조는 금세기 역대교황들, 최근의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가르침이 담긴 해 방문헌에서 지적된바 있으며, 이것은 잔치를 벌이는 부자와 불쌍한 라자로의 성서 비유를 극대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 현상은 너무도 크게 만연되어 있어서, 각종 정치적 압력 하에 시행되고 있는 재정, 금융, 생산과 상업 등의 구조들이 도대체 세계경제에기야가 되고 있는지 의문스럽게 한다. 이 구조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불의한 사회 상황들을 치유할 능력도 없으려니와 현재의 시급한 문제제기와 도덕적 요망에 대응할 능력도 없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 구조들은 인간 스스로 조성한 긴장 속에 인간을 가두어놓고, 원자재와 동력자원을 급속한 속도로 고갈시키며 지구 물리학적 환경을 해침으로써 비참한 영역을 부단히 확대시키고 있으며 번민과 좌절, 그리고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방관할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 최대의 이익을 올리려고 애쓰는 이들이나 다른 편에서 손해를 보고 상해를 입으면서 그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 이들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극적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것은 특권적 사회계층들과 부강국들이 긴밀히 밀착해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극도에까지 부(富)를 축적하고 악용하여, 그들에게는 흔히 부가 각종 병폐의 원인이 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통화팽창의 열기와 실업(失業)의 전염병이 휩쓴다. 이러한 현상들은 세계의 현황에서 현저하게 감촉되는 윤리적 무질서의 증후(症候)들이며, 따라서 인간의 참다운 존엄성에 부합한 과감한 창조적 대책이 요구되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 같은 과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넓은 의미의 연대성의 원리에서 영감을 받아 적절한 기관들과 구조들을 효율적으로 모색할 수 있겠다. 무역의 분야에 건전한 경쟁의 법칙이 통용될 수 있게 한다든가, 부를 시급하게 또 폭 넓게 재분배하고 그것을 통제한다든가 하여, 경제적으로 개발도상인 민족들이 자기네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점차적으로, 효과적으로, 향상을 도모하게 할 수 있겠다.

경제생활 구조의 변혁이라는 불가결하고도 어려운 도전은, 인간의 정신과 의지, 그리고 마음의 개관천선이 없이는 진척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성격의 것이다. 이 과업은 자유롭고 또 연대의식으로 결속된 개인들과 민족들 편에서의 과감한 투신을 요한다. 무릇 자유라는 것이 개인적 집단적 이익을 촉구하는 본능으로 혼동 되게나 쟁투와 지배를 탐하는 본능-(그것을 감싸는 이데올로기적 색채야 어떻든 상관없다)-으로 혼동되는 일이 너무도 흔하다. 이런 본능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현저하게 활동하고 있으므로, 진정 인간다운경제가 운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 안에 있는 심원한 능력들에 의해서 이런 본능이 제어되고 지배되어야한다. 실상 이 능력들이 민족들의 참다운 문화를 결정한다. 이 능력들이야 말로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표시하고 경제 분야에도 그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노력의 원천이 된다.

경제발전과 그 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요인은 각계인간과 민족의 전반적이고 연대적인 발전이라는 전망에 비추어 계획되고 시행되어야만 하는데 이것은 나의 선임자 교황 바오로 6세께서「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에서 설득력 있게 천명하신 바이기도 하다. 그렇지 못할 때에「경제적 진보」라는 범주가 독자적으로 상위범주가 되어 인간 실존전체를 그것의 국소적 요구에 충족시켜 버리고 인간을 질식시키며 사회를 붕괴시키고 그것 자체의 긴장과 과도한 횡포에 스스로 얽혀드는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일은 가능하다. 여기서 일일이 분석하여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성취된 몇몇 사상과 결과로 보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입증되었다. 적어도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경제라는 거대한 분야의 토대로서 윤리적 책임감을 조상하고 받아들이고 깊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책임은 인간이 반드시 져야하는 것이며 거듭 또 언제나 인간이 져야 하는 책임이다.

이 책임은 누구보다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특히 명료한 것이다. 마태오복음에 실린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거한 최후심판의 장면을 상기할 때에-우리는 언제나 이 장면을 상기하고 있어야한다 -이 점은 명백하다.

이 종말론적 장면은 인간의 역사에 언제나「적용」되어야한다. 인간행위를 재는「척도」로 삼아야한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독립생활에 눈뜨기 시작한 신생국가들과 민족들에게 빵과 문화적 원조를 베푸는 대신에 때로는 넘칠 정도로 무력충돌과 전쟁에 쓰이는 현대무기와 파괴수단들을 제조하는 사실을 상기할 때에 위의 말씀은 더욱 강력한 경고를 띠게 된다. 이들 무력충돌과 전쟁은 자국의 정당한 권리와 주권을 수호하는 요청에서 오는 것이기보다는 형태가 다른 국수주의, 제국주의 및 신 식민주의의 책동인 경우가 더 많다. 전쟁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엄청난 군비의 투자가 만일 생명을 지키는 식량의 투자로 전환된다면 전 세계의 비참과 기아의 지대가 단시일에 비옥한 지대로 변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상과 같은 고찰이 부분적으로는「추상적인」것으로 머물지도 모른다. 「양측이」이 각자의 과오는 망각하고 서로 상대방을 규탄하는 구실을 줄지 모른다.

또 교회에 대한 새로운 고발을 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영과 말씀과 사랑의 무기 외에는 달리쓸무기가 없지만「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꾸준히 말씀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이우에서 교회는 양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애원하며 하느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으로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이 애걸하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인간의 파괴와 전멸을 초래하는 일을 삼가라! 기와와 비참으로 시달리는 이들을 여러분의 형제·자매로 생각하라! 각 사람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라!

17, 人權은「문제」(文字)인가, 「정신」(精神)인가?

금세기는 인간에게 대재난의 세기, 대 파멸의 세기가 되어왔다. 그것도 단지 물질적 파멸만이 아니고 도덕적 파멸, 참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도덕적 파멸의 세기다. 이 이면에서 한 시대나 세기를 다른 시대나 세기와 비교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 비교가 변천하는 역사적 기준들을 표준으로 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교들을 내세우지 않고 보더라도 금세기가 인간들이 서로에게 수많은 불의와 고통을 끼쳐온 세기중의 하나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형세가 결정적으로 제어 되었는가? 우선 이점에서 우리는 국제연합을 탄생시킨 위대한 노력, 인간의 개관적이고 불가침한 권리들을 정의하고 확립하여 회원국들이 철저히 그 인권을 옹호하도록 의무를 지우려는 노력을 상기하면서 존경심과 미래에 대한 깊은 희망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의는 현대국가의 거의전부가 채택하고 비준하였으며, 이것은 앞으로 전 세계를 통해서 인권이 인간의 복지를 위한활동이 기본원칙이 되리라는 하나의 보증이라고 여겨진다.

교회로서는 이 문제가 현대세계 내의 교회의 사명과 얼마나 긴밀히 직결되는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요한 23세와 제 2차 바티깐 공의회, 그리고 근자에는 바오로 6세께서 상세한 문헌을 통해서 선언하신 바 있거니와, 참으로 인권이야말로 사회평화와 국제평화의 기반이 된다.

무엇보다도 평화는 인간의 불가침한 권리에 대한 준중으로 귀착된다. 그 대신 전쟁은 이 권리의 유린에서부터 초래되고 아울러 이 권리를 더 심하게 유린하는 결과를 빚는다. 평화시에 만일 인권이 유린 된다면 그것은 특히나 고통스러운 일이며 진보라는 견지에서 볼 때에 그것은 인간을 거스리는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불가해하게 폭로하는 것으로서 소위「인도주의」를 자처하는 강령과는 도무지 상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강령·경제강령·정치강령 또는 문화강령치고 인도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강령이 어디 있는가? 물론 그 강령의 정강이 수립되는 단계에서는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알력이 있게 마련이지만 현대 세계에서의 어느 강령치고 비록 차이는 있더라도 반드시 인간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는 강령은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