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요한 바오로 2세 첫 회칙 - 인류의 구원자] 3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4-29 제 1152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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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은 창조를 새롭게 한 사랑의 신비 
인간이 사랑에 참여치 못할 때 그의 삶은 무의미 
복음은 인간 가치에 대한 깊은 경탄 
자신을 알려면 존재전체로 그리스도께 몰입 해야
9. 救贖神秘의 神的次元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뽑은 이 놀라운 문구를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하게 해주신 분이심을 잠시라도 잊지 않는다.

그분이 화해하게 해주셨고 그분만이 화해하게 해주실 수 있었다. 그분만이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채워드리실 수 있었으며. 태초부터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세상의 온갖 富를 주시며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심으로써』『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사람을 만드셔서 그를 밖으로 펴명 하신 아버지의 父性을 채워드리실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첫 계약을 깨뜨리고 하느님이 『또한 여러 번 사람들과 맺으신』훗날의 계약들을 깨뜨림으로써 어느 면에서 인간에게 거부당했던 하느님의 사랑과 父性을 그분이 채워드렸고 또 그분만이 채워드리실 수 있었다.

세상의 구속-창조를 새롭게 한 위대한 사랑의 신비-은 그 가장 깊은 뿌리에 들어가 보면 인간「마음」-「맏아들의 마음」-안에 이루어진 정의(正義)의 충만한 실현이다. 이것은 그 정의가 영원으로부터 맏아들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예정되었고 은총에 불리우고 사랑에 불림 받은 많은 인간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기 위함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시요. 나자렛 요셉의 아들로 여겨지시던 인간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신」갈바리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원한 父性의 또 하나의 참신한 發露였으니 이로써 하느님은 참으로 거룩하신『진리의 성장』을 주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와 다시 가까워지시고 각 사람과 다시 가까워 지셨다.

구속의 신비에 지울 수 없는 도장을 찍는 아버지의 이 계시와 성령의 부어지심 이야말로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다.

거기서 創造의 하느님이 救贖의 하느님으로 계시된다. 『진실하신』하느님. 창조의 날에 드러내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성실하신 하느님으로 계시되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정의가 요구하는 바는 무엇이나 다 이루기전에는 돌아가지 않는 사랑이다.

그러므로『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기셨다』성자께서 죄라면 아무것도 모르시면 서도『죄 있는 분으로 여기셨다면』그것은 오로지 항상 창조계 전체보다 위대한 사랑. 하느님 자신인 그 사랑을 계시하시기 위함이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무엇보다도 우선 사랑은 조보다. 약점보다『피조물이 제구실을 못하게 된 것』보다 위대하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은 항상 일어나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방탕한 아들을 맞으러 달려갈 준비가 항상 되어있으며『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로 불리움을 받은『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항상 기다리며 찾는다.

이 사랑의 계시를 자비(慈悲) 라고도 일컫는데 인간의 역사에서 이 사랑과 자비의 계시가 예수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형상과 이름을 취했던 것이다.

10. 救贖神秘의 人間的次元

인간은 사랑 없이 살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살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불가해(不可解) 한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生은 무의미하다.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구주 그리스도께서『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보여 주시는』분이 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이것이 구속신비의 인간적 차원이다. 이차원에서 인간은자신의 인간성에 깃들어 있는 위대함과 존엄성과 가치를 다시 발견한다. 구속의 신비 안에서 인간은 새로「표현되며」어느 면에서 새로 창조된다.

인간이 새롭게 창조된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무릇 인간으로서 자신을 자기존재의 즉각적이고 부분적이며 때로는 피상적이고 심지어 가공적(架空的) 이기까지한 척도와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자신의 불안정과 불확실. 자신의 약함과 죄 많음. 자신의 삶과 죽음을 그대로 안고 그리스도께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 전체로 그리스도께 몰입하여야 한다.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降生과 救贖의 실재전부를『하여야 한다. 만일 인간 내면에 이 깊은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그 결실로 인간은 하느님을 흡수할 수 있을뿐더러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깊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인간이 그토록『위대한 구세주를 얻게』되었다면 인간이『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느님이 당신의『외아들을 보내주시었다면』창주주의 눈에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이겠는가!

사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대한 그 깊은 경탄을 일컬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달리는 그리스도교라고도 일컫는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이 경탄이야말로 세계 안에서 행하는 교회의사명. 더더욱「현대세계 안에서」행하는 이 사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경탄이야말로 그리스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대한 이 경탄은 동시에 하나의 신념이자 확신이기도한데 이 확신은 그 근본이 신앙에서 비롯하는 확신이지만 실상은 신비롭고 드러나지 않는 양상으로 진정한 人本主義의 모든 부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이 경탄은 인간과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확고히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분의 특정한 市民權-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전체를 부단히 관조함으로써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救贖이 인간에게 그의 존엄성을 결정적으로 회복시켜 주었음을 신앙의 확신으로 깨달아 안다. 또한 그 구속의 세계 안에 사는 그의 인생의 의미를 죄 때문에 상당한 범위까지 손상되어 있었던 의미를 되돌려 주었음을 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구속이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는 빠스카 신비 속에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그렇지만 역할은 인류의 視線을 똑바로 돌리는 것. 전 인류의 意識과 경험을 하느님의 신비를 향하여 방향을 잡아주는 것. 만민으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구속의 深測에 친근해지도록 돕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역 즉 인간의 마음과 양식과 사건들의 영역에 관여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