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렇게 말씀을 전했다 - 베버 저「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본 선교의 발자취] 1.「고요한 아침의 나라」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4-29 제 1152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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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문화 보존위해 저술한 듯  
이 저서로 뮌헨대학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받아  
촬영한 칼라사진은 한국 최초의 것
독일 성 오틸리엔 베네딕또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총원장은 새로 서울에 진출한 자기회의 수사와 신부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하고 걱정이 되어 1911년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1월 12일「제네바」에서 배를 탔다. 성 오틸리엔의 원장신부가 비서격으로 그리고 한국에 나가게 된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가 그를 수행하였다. 2월 21일 부산항에 도착한 베버 총원장 일행은 기차를 갈아타고 그날 밤 서울 남대문 역에 도착하였다. 이래 4개월간 베버총원장은 서울ㆍ수원ㆍ안성ㆍ공주ㆍ해주ㆍ신천ㆍ평양ㆍ대구 등 한국의 방방곡곡을 둘러보았다.

한국도 이제 폐쇄된 나라는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아시아 어디서와 마찬가지로 도처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근대화의 거센 바람을 타고 옛것이 사라지고. 일제의 同化정책으로 한국적인 것이 빠른 속도로 말살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많은 것이 사라졌으나 아직 남아있는 것만이라도 구출해야겠다는 초조감에서 베버 총원장은 부지런히 여행의 인상과 옛것에 대한 추억을 메모하는 한편 한국의 풍물을 흑백과 칼라사진에 소상하게 담았다.

미구에 서울의 성곽과 성문은 파괴되어 古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고 한국의 전통문화와 풍습 또한 일제의 탄압으로 재빨리 말살될 것을 예견한 베버총원장은 남은 것만이라도 구해야 하겠다는 사명감마저 느꼈다.

이렇게 그가 한국기행을 통해 본국으로 갖고 돌아간 일지와「스켓치」와 사진 등은 그에게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여행기념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그것을 혼자서 고이 간직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을 공개하기를 요청하는 여론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필름에 담은 한국풍물의 대부분을 이미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기행문을 정리하여 1915년「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란 책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가 한국에서 받은 인상과 기억을 꾸밈도 과장도 없이 그대로 전하려했다. 그래서 그는 메모를 토대로「일지」식으로 쉽게 옮겼고 결코 민속학적인 학술지를 쓰려하지 않았다. 뿐더러 그의 기행문에 구체적인 예술성을 더하고자 페이크기의 흑백과 칼라사진 52매와 그 밖의 2백90매의 사진과 그림을 삽입시켰다. 그가 촬영한 칼라사진이 한국 최초의 것이 될 줄이야 누가 짐작하였으랴.

총원장 신부의 저서는 곧 독일에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뮌헨대학은 이 저서를 대상으로 그에게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총원장 신부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와 오늘. 내일의 밝은 전망을 소상히 소개하였다. 한편 독일의 신문들도 앞 다투어 이 책을 소개하고 불후의 대작으로 그 공적을 치하하였다.

총원장 신부는 자기가 독일로 갖고 돌아온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사랑을 독자들 또한 그의 책에서 발견해주기를 바라마지않았다. 베버 신부 만큼 한국과 한국민을 사랑한 선교사도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국민과 더불어 亡國의 恨을 함께할 수 있었다. 그는 부산 부두에서 작별인사로 대한만세를 맘껏 외치고 싶었다. 결국 그는 한국민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가는 기분으로 한국을 하직하였다.

해설=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