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요한 바오로 2세 첫 회칙 - 인류의 구원자]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4-15 제 115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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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교회는 만인의 구원 위해 자기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할 능력 갖춰
교회의 자기 의식 - 사랑의 원천
복음 발견토록 넓게 개방 돼야
교회일치는 누구도 방해 못해
솔직ㆍ겸허하게 일치 계속 돼야
모든것 이해 하고 분석 하며 옳은 것 인정 하려는 심성은 고귀한 것
I. 위대한 유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존경하는 형제 주교들과 사제들과 수도 가족들과 자녀들에게와 선의의 모든 남녀들에게 교황 직무 초기에 이 회칙을 보내는 바이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사도적 축복을 보내는 바이다.

1. 2천년 대를 마치면서

인간의 구주(Redemptor Hominis)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시다.

교회와 현대 인류의 전 가족이 지금 살아가는 세계의 이 엄숙한 순간에 나의 생각과 마음은 그분께로 향하고 있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겨진 계획으로 나의 경애하는 선임자 요한 바오로 1세의 대를 이어 로마 성 베드로의 좌에 맡겨진 보편적 봉사의 직무를 나에게 지우신 이 시기는 사실상 이미 서기 2천년에 매우 가깝다. 미래를 예측하려는 상당한 노력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싯점에서 그때가 인류사의 표면에 무엇을 남기게 될는지. 각 국민과 국가. 나라와 대륙에 무엇을 초래할런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비록 고르지는 않으나 지구 주변까지 두루 퍼져있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게는 그 해가 대경축년(大庚祝年)이 될 것이다. 연대 상의 정확성을 찾아 갖가지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고 여기는 선입견은 일단 젖혀둔다면 우리는 성 요한이 그의 복음 서두에 표현한 신앙의 근본진리 곧『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말씀과 다른 대목에서『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 하셔서 외아들을 모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는 말씀을 각별히 상기시키고 다시 깨우쳐줄 그 기일을 향해서 이미 다가가고 있다.

또한 우리는 어느 면에서 새로운 대림의 계절. 기다림의 계절을 맞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열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아들을 시켜. 사람이 되시고 동정마리아께 태어나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구속행위(救贖行爲) 는 하느님의 애정 깊은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역사의 정점(頂点) 을 기록했다.

하느님이 인류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고 인간으로서 이 역사 속의 배역(配役)이 되신 것이다. 그 배역은 수십억 인간중의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유일무이한 배역이었다. 강생을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초부터 갖추어 주고자 뜻하셨던 그 비중(比重)을 인생에 부여하셨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고 당신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어울리고 당신의 온전한 자유에 부합한 방법으로 그 비중을 결정적으로 부여하셨다. 그리고 원죄와 인류의 죄악으로 점철된 전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 인간 지성과 의지와 마음이 오류들을 생각할 때에 우리로서는 오로지 탄복하며 거룩한 전례에 나오는『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는 말씀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만큼 풍성하게 부여하셨다.

2. 신임 교황직의 첫 발언

작년 10월 16일 교회법상의 선출이 있은 뒤『수락 하겠읍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나의감정과 생각은 다름 아닌 구세주 그리스도께로 쏠렸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께 신앙으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께 의탁하면서 크나큰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락 합니다.』고 대답했다. 오늘 나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에게 나의 대답을 공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위에 언급한 강생이라는 첫째가는 근본진리와 내가 로마의 주교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뽑힌 선거결과를 수락함으로써 베드로의 좌에서 나의 특별한 임무로서 수행하게 된 봉사직무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천명코자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친애하는 선임자 요한 바오로 1세 께서 택하신 같은 이름을 택했다. 사실 1978년 8월 26일에 그분이 당신은「요한 바오로」로 하겠다는 말씀을 추기경단에게 하시자 교황직의 역사상 그 같은 이중 칭호를 사용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새 교황직에 은총의 전조를 분명히 보았었다. 그 교황직이 불과 33일 만에 끝났으므로 (단순히 그 직위를 계속한다는 뜻만 아니고 똑같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뜻에서) 그 직책이 나에게 주어졌다. 나의 존경하올 선임자께서 하신대로 두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그분처럼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께서 교회에 남기신 위대한 유산에 애경을 표하고 하느님의 보우를 입어 그 유산을 발전시키겠다는 나의 개인자세를 표방하고자한다. 나는 이 두 이름과 두 분의 교황직을 통해서 사도좌의 모든 전통과 20세기와 그 이전의 세기에 봉직하신 나의 선임자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 시대를 차례로 거슬러 울라가 가장 멀리는. 교회 안에서(베드로의 좌에) 전혀 특수한 위치를 부여한 사명수임(使命受任)과 봉사직무(奉仕職務)의 대역에 연결되는 것이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는 내가 직접 계승하여 일을 시작하려는 발판이 되신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언약하시고 또 보내신 성령께 한없는 신뢰와 순종을 바침으로써. 요한 바오로 1세와 함께 장차 이두분의 유업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수난하시기 전날 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가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된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일러 주실 것이다』

3. 진리와 사랑의 성령을 신뢰함

그러므로 나는 진리의 성령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림으로써 최근의 교황직 들이 이룩한 풍부한 유업에 몸을 담는 바이다.

이 유업은 과거에 일찌기 볼 수 없었던 형태가 새로운 교회의 의식(意識)에 깊이 뿌리를 박은 것이다.

이것은 요한 23세께서 소집하여 개막하시고 뒤에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성공리에 폐막되었고 꾸준히 실천에 옮겨진 제2차 바티깐 공의회 덕분이며 그동안 나는 바오로 6세의 활동을 매우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공의회 이후의 어려운 교황 재위기간 중 바오로 6세께서 보이신 심원한 지혜와 용기에 끊임없이 경탄하였고 그분의 꾸준함과 인내에도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그분은 베드로의 배인 교회의 키잡이로서 교회가 안으로부터 가라앉을 것 같던 가장 위태로운 순간까지도 하늘이 내려주신 침착과 균형을 취할 줄 아셨고 교회의 견고함을 믿는 주저할 줄 모르는 희망을 항상 보존하셨다.

성령께서 우리시대의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에 말씀하신바와 이 교회를 시켜 모든 교회들에게 하신말씀은 일시적으로 예의치 않는 점이 없지 않으나 날이 갈수록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성숙하고 견고하게 만들며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세적 사명을 의식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바오로 6세 께서는「당신의 교회」(Ecclesiam suam)라는 말로 시작되는 기초회칙에서 교회의 현대적 의식(現代的意識)을 첫째 주제로 선정하셨다.

본인의 교황직의 서말을 장식하는 본문서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이 회칙을 참조하고 이 회칙과 나를 연결시켜보겠다

교회의 의식(意識). 성령께 비추임 받고 격려 받으며 자신의 신적 신비와 자신의 인간적 사상과 심지어 자신의 인간적 약점까지 갈수록 깊이 헤아리는 의식. 이 의식이 교회가 지닌 사랑의 첫째가는 원천이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 물론 반대로 사랑이 교회의 의식을 강화하고 심화함도 사실이다.

바오로 6세 께서는 그처럼 극도로 명료한 교회의 의식을 우리에게 증거물로 남겨주셨다. 그분의 교황직을 장식한 많은 것들 때로는 고통을 야기한 것들을 통해서 그분은 교회에 대한 사랑 공의회가 일컫는 대로『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요 도구(道具)』인 성사(聖事) 와 비슷한 교회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는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4. 바오로 6세의 첫 번 회칙에 대한 언급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의 의식(意識)은 보편적 개방(普遍的開放)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이방인의 사도가 한말대로 만인이 교회에서『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개방은 그리스도께서『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말이아니라 나를 보내는 아버지의 말씀이다』라고하신 그대로 교회의 진리에 관한 확신 및 교회의 본질에 관한 인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사도적 활력(活力)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위촉하신 진리 전체를 온전하게 고백하고 선포하는 선교사적 활력을 주는 것도 바로 그 개방이다. 동시에 교회는 대화(對話)를 꾸준히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오로 6세 께서는 회칙「당신의 교회」에서 대화를 수행할 분야들을 명백히 구분하시면서 이것을 일컬어「구원(救援)의 대화(對話)」라고 하셨다.

바오로 6세의 교황직의 프로그램을 제시한 이 문헌을 오늘 언급하면서 나는 나의 아버지이시기도한 이 위대한 선임자께서 공의회 이후에 교회를 괴롭힌 여러 가지 내부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교회의 참다운 면모를 보여주실 줄 알았다는 사실을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류 가족의 상당수가 인간 실존의 여러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사명과 그 봉사가 인류에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깨닫게 될 것 같다.

때로는 외부에서 오는 이러한 의식이 내부에서 교회와 교회의 제도나 구조. 성직자들과 그들의 활동을 공격하는 비판적 태도보다 훨씬 강력했었다. 점증하는 이 비판이 여러 이유에서 기인했으며 나아가서 그것이 반드시 교회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결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시인한다.

그 동향중의 하나는 공의회에서 논란이 심했던 소위 개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제로 교회는 「마음이 겸손하신」스승의 본을 받아 겸손을 근본으로 삼아야 마땅하며 교회의 인간적 특성과 활동을 과시하려는 모든 것에 비판적 감각을 지녀야하며 항상 자기를 극구 삼가야했다는 말도 옳다.

그렇지만 비판은 정당한 한계를 지녀야한다. 그렇지 못할 때 비판은 건설적이 못되고 우리가 주로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충만히 누려온 진리와 사랑과 은총을 감사할 줄 모르는 소행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비판은 봉사의 자세가 아닌. 자가 의사에 따라 타인들의 의견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폭로하는 것으로서 때로는 너무나 무분별하게 팽창한다.

바오로 6세께서 천차만별한 인간적 의견에 깃들어있는 진리의 편린들을 존중하시면서도 이 배의 키잡이를 하셨다는 것은 감사드릴 일이다.

요한 바오로 1세를 통해서 또 그분의 뒤를 바로 이어 나에게 맡겨진 교회는 당연히 내부적 곤란과 긴장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교회는 과도한 자기비판에 대해 내면 상으로 훨씬 강해져있다.

여러 가지 무사려한 비판에 대해 보다 비판적이 되었고 각종「신기한 것」에 대해서도 훨씬 저항적이 되었으며 분별(分別)의 정신도 더욱 성숙해졌고 교회의 영구적인 곳간에서『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낼』줄 알게 되었으며 자기의 고유한 신비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으며 이상의 모든 사실로 미루어 만인의 구원을 위하는 자기의 사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

5. 공동성(共同性)과 사도직(使徒職)

표면상으로야 어떻든 간에 교회는 봉사에 대한 협력에 있어서도 사도직에 대한 각성에 있어서도 전보다 훨씬 일치되어있다. 이 일치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가 언급한 공동성의 원리에서 비롯한다.

그리스도 친히 이 원리를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열두 사도단(使徒團)의 바탕으로 삼으셨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하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전 세계에 널리 퍼져갈수록 수가 증가하는 주교단(主敎團) 안에서 이 원리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신다.

공의회는 공동성의 원리를 말로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공의회는 공동성의 상설기구(常設機構)가 설립되기 바란다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굉장한 활력를 새로 불어 넣었다.

그리하여 바오로 6세 께서는 주교 시노드를 설립함으로써 이 기구를 발족시켰으며. 주교 시노드의 활동은 당초부터 그분의 교황직에 새 차원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요한 바오로 1세의 교황직과 나아가서는 그분의 부당한 후계자인 나의 교황직에 까지 선명하게 부상되었다.

공의회 이후의 어려운 시기에 주교단(주로 시노드를 통해서 베드로의 후계자와의 일치를 드러냈다)의 한마음으로 일치된 입장은 의혹을 물리치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교회를 쇄신하는 올바른 길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공동성의 원리가 특히 과시되었다.

그리하여 시노드는 다른 것보다도 복음 선교(福音宣敎)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띠게 되었다. 그것이 사도적 권고「현대의 복음 선교」(에반젤리이눈씨안디)에 나타나있으며 이 문헌은 사도적 사목적 쇄신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서 기꺼운 환영을 받은바 있다. 교황 바오로 6세 께서 서거하시기 1년 전에 개최된 교리교육을 주제로 다룬 주교 시노드의 작업에서도 같은 노선이 취해 졌다.

이 작업의 결과는 곧 사도좌에 의해서 정리되어 반포될 예정으로 있다.

주교 공동성(主敎共同性)이 어떤 형태로 표시되고 발달되어 왔는가를 논하는 이 마당에서 교회 전체에 걸쳐 각국 주교회의가 강화된 과정과 국제적 또는 대륙적 성격의 여타 공동적 기구들이 강화된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수세기에 긍한 교회의 전통을 살피건대 교구ㆍ관구ㆍ전국 시노드의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의 시험을 거친 이 기구들이라던가 각 개별교구는 말할 것도 없이 수도 대주교좌(首都大主敎座)기구 같은 주교들에 의한 다른 공동적 협조의 형태들이 자체의 동질성을 온전히 파악함과 동시에 교회의 세계적 일치 안에서 자체의 고유한 원형(原型)을 의식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공의회의 사상이었으며 바오로 6세께서 부단히 실현 하시려던 이념이었다.

이 같은 협력과 책임분담의 정신이 사제들에게도 퍼지고 있으니 공의회 이래로 생겨난 여러 사제회의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같은 정신이 평신도들에게도 확산되어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기존단체들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흔히 전과는 다른 노선과 탁월한 활력을 갖춘 새 단체들을 출현시키고 있는 중이다.

나아가서 교회에 대한 자기책임을 의식하는 평신도들은 교구 시노드와 본당 및 교구 사목회의 분야에서 사목자들이나 봉헌된 생활을 하는 단체 대표들과 협력하는데 기꺼이 투신해왔다.

나는 나의 교황직을 시작함에 있어서 이 모든 일들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형제자매들을 따뜻이 격려하며.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업적과 교회의 이 생명의 새 물결. 의혹과 부패와 위기라는 중상보다 훨씬 강열한 움직임을 일으키신 위대한 선임자들의 업적에 진심으로 감사드릴 명분으로 알고자한다.

6. 그리스도교 일치에로의 여정

교회일치의 새 방향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창의적 노력에 관해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잊을 수 없는 교황 요한 23세 께서는 그리스도교 일치의 문제를 복음적 명료성에 입각하여 우리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서 오는 단순한 귀결로 제시하셨다. 이 뜻은 예수께서 여러 기회에 공표하신바 있거니와 당신이 죽으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올리신 기도에서『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8)라는 말씀으로 각별히 표명하신바 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도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으로 이 요청에 정확하게 응답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그리스도교도 일치 촉진 사무국」의 활동을 이용하여 이 일치를 성취하는 어려운 첫발을 내디디셨다. 우리는 그 길을 상당히 멀리까지 간 것일까? 상세한 답변을 할 뜻은 없지만 우리도 실제적이고 중대한 진전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항구하고 인내 롭게 일해 왔고 다른 그리스도교회들과 공동체들의 대표들 역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수고해왔다. 이 일을 두고 우리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세계가 처한 현재의 역사적 상황 하에서는 일치운동의 문제를 두고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보는 유일한 방도는 솔직하고 꾸준하게. 겸허하고 또한 과감하게 보다 가까워지고 일치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뿐이다.

교황 바오로 6세 께서는 이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친히 본을 남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거나 도중에 발생할만한 곤란 때문에 용기를 잃지 말고 꾸준히 일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성실하지 않고 그분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감히 그런 것을 저지를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곤경에 부딪쳤거나 최소의 일치운동 노력이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여기기 때문에 원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이러한 노력이 복음에 해를 끼치며 교회내의 균열을 더 크게 만들며 신앙과 윤리문제에 사상적 혼란을 가져오며 특정한 무관주의(無關主義)로 끝나고 만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의견들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기네 우려를 기탄없이 발표 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면에서도 정당한 한계가 지켜져야 한다. 교회 생활의 이 새로운 단계가 우리에게 특히 주의 깊고 심원하고 책임 있는 신앙을 요구함이 사실이다. 참다운 일치운동은 개방된 자세와 가까워지려는 노력과 대화를 할 줄 아는 능역과 진리의 복음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와 함께 진리를 추구하는 노력을 뜻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꾸준히 고백해왔고 가르쳐온 신적 진리의 보고(寶庫)를 포기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감소시키지도 않을 뿐더러 그럴 뜻도 없다. 어떤 동기로든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신자들의 보편적 일치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충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이 질문을 다시 제기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인간적 약점이 많고 과거 수세기의 과오가 아무리 심하다 할지 언정. 최근에 성령께서 말씀하셨고 공의회 동안 우리가 들은 바를 통해서 밝혀진 주님이 은총을 우리가 불신할 수가 있을까?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도께서 우리를 두고『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은 총은 헛되지 않았읍니다』고 하신 응변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부정하게 된다.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바는 비록 정도와 양상이 다르게라도 비그리스도교적 종교 대표자들과 가까워지려는 활동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 대화와 접촉. 공동기도. 인간영성(靈性)의 보고(寶庫) 를 추구하는 노력을 모색하고 있다.

알다시피 이 종교들에는 인간 영성의 보고가 없지 않다.

사실 비 그리스도교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의 확고한 믿음-신비체의 볼 수 있는 경계 밖에서 역사하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믿음이 그리스도신자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종종 있지 않는가? 그들의 믿음을 보고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네가 하느님이 계시하시고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에 대해 그토록 빈번히 의심에 빠지고 윤리 원칙에 그토록 이완되어 있으며. 도덕적 유약(道德的柔弱)의 소지를 남기고 있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는 심성. 모든 제도를 분석하려는 심성. 옳은 것은 인정하려는 심성을 갖추는 일은 고귀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거나. 윤리 원칙들이 약화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윤리 원칙들이 결여될 경우에는 전체사회의 생활에 곧 영향을 미치고 개찬할 결과들을 초래하게 된다.

<계속>

교황 요한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