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령쇄신 - 무엇이 문제인가?] 3. 평가에 있어서의 문제점들 - 하

K. 맥도널 신부·미국인·베네딕또회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8-27 제 1118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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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전형적인 본당의 기도회에서는 대개 저녁 8시쯤이면 약 15명의 신자들이 모여든다.

그들 간의 분위기는 대체로 화목하고 다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듯했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신부였다. 그러나 딴 본당의 그룹에서 신부는 지도자가 아닌 정규회원이었다 성서봉독을 한 후 약 5분 동안 묵상과 침묵이 계속됐다. 지극히 감정적이라고 알려진 이런 모임에 침묵이 잦은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기도하다.

얼마 후 한사람이 침묵을 깨뜨리며 콘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먼저 봉독한 성서의 본문을 인용했지만 거기에 대한 해석은 하지 않고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자신의 생활과의 내적인 대결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였다.

이어 침묵과 짤막한 기도가 있었는데 찬미의 은사·힘의 은사·다른 이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예민해질 수 있는 은사 등을 간구했다.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면서 찬미가를 부르자다들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한 젊은 사업가가지난 기도회 이래 자신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찾았는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기도 생활뿐 아니라 그의 직장 상황과도 관계되는 일로 특별히 어려운 동료를 이해하며 돕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두 사람의 증언이 더 계속 되었지만 모두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는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어떤 남자가 가정문제로 기도를 청했다. 그 남자가 방한 가운데에 무릎을 꿇자 다른 사람들이 빙 둘러서더니 그의 어깨위에 손을 얹었다. 이때 한사람이 약 30초 동안 방언을 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영어로 기도하고 있었다.

3분후 기도를 청했던 남자가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린소녀가 시편을 읽고 나자 다시 침묵-그리고 나서 누군가가 커피를 마시자고했다.

커피타임은 약 30분이었다.

그렇게 장엄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으면서 기도회는 다시 계속되었다.

침묵과 시편 암송으로 약2신반의 기도회는 끝났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新성령운동기준과는 상당히 달리 지극히 조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회를 평가할 때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어야 할 것이다.

1、가톨릭 성령운동자들은 성령에게서 오는 것과 인간심리에서 오는 것과를 충분히 구별하지 않고 있다.

기도회에서 깊이 감동을 받은 체험과 성령의 능력을 동등시해서는 안된다. 다른 한편 비운동자들은 격한 감정이 게재되어있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성령이 부재한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2、 성령운동자들은 루까의 신학과 코린도 전서를 절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신약성서 전체와는 달리 드러나는 은사에만 치중하게 된다.

3、특히 성령운동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중에서는 예언의 은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많은 성령운동가들이「도와주는 봉사」와「지도의 능력」(코·전12, 28)과 같은 정작 받아야하는 은사들을 잊고 있다. 그러나 고전적 성령운동자들이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형태, 즉 성령의 오심과 방언과의 관계는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불변의 형태라며, 이것을 일종의 법으로 제정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성서학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

4、어떤 가톨릭 성령운동자들은 모든 이가 방언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꼬린토 전서12장30절에서 볼 때 모순이라고 할 수 있겠다.

5、성령운동자들은 드러나는 성령작용에 관한 성서본문해석에만 큰 비중을 두지는 않는다.

성령의 모든 은사가 역사의 매순간 작용해야할 이유도 없고 성령이 성서에 언급된 방식으로만 드러나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필요성에 맞는 새로운 은사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6、성령운동자들은 분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성령세례를 받은 역사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운동자들은 흔히 聖化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교회전체에 강요하려 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놀람과 반항, 결국 공개적인 반대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성령운동자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새로 가입한 운동자들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 반대자들은 극렬하게 반대를 계속했다.

가톨릭의 성령운동이 상당히 적은 저항을 받는 것은 부분적으로「파띠마」에서 보아온 기적이라는 개념과 친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신부가 성령운동에 개입되었다고 해서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처럼 본당에서 쫓겨난 예를 보지 못했다.

7、성령운동은 개인주의와 주관주의 경향이 짙다. 어떤 가톨릭 성령운동자들은 예언적 발언, 특히 자기네들의 예언적 발언을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절대적인 확신으로 받아들인다.

요즘에는 고전적 성령운동자들이 훨씬 더 지혜롭다.

예언은 교의와 공동체생활의 규범을 떠나 그 자체로서는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가톨릭 성령운동자들은 마치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르칠 수 없는 특별한 성령의 인도에 따라 행동 지어지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남용으로 인해 그 운동이 불신당해서는 안 된다. 크리스찬 생활을 예의바른 이성주의로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

성령께 열려있고 내부로부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충만한 생활과 은사의 행사는 성서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유효하며 교회의 본성에서 흘러나온다. 연구결과 성령운동자들은 심리적으로 결핍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관대할뿐더러 타인에게로 향하며 심리적으로도 안정된 감이 있다. 가톨릭 성령운동자들은 흔히 버렸던 것들-묵주의기도, 성체조배, 성모신심-을 되찾는다. 이것은 보수적인 신학 때문이라기보다 변화시키는 체험의 효과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굉장한 갈증을 체험하고 그들의 종교적인 역사 내에 있는 모든 길을 다 이용하여 갈증을 해소시키려 한다. 어떤 이들은 고백성사와 평일미사와 영성체를 다시 자주 하게 된다. 교회의 성사, 전례생활전부가 보다 의미 있게 되고 성사와 전례와의 관계에서 성령운동 신학을 연구하려한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 놀라운 기쁨이라고 애기한다. 새로운 윤리적 의식과 파괴된 인간상호관계의 회복과 결혼·알코올중동·약물중독 등의 문제해결에 진전이 나타나는 듯하다.

경우에 따라 영원히 해결되기도 하고 제자리에 돌아오기도 한다.

교회 내 지도층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주저하는 태도이다. 성령운동자들은 운동에 참여하면서 전보다 더 구조적인 교회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초기의 대학성령운동자들은 교회와 주교, 교회의 구조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비판적이지만 그들은 차라리 교회 내 상좌의 사람들을 동정하면서 교회의 구조적 과정을 이해하는편이다. 성령세례 체험과 드러나는 예언의 은사에 대한 운동자들의 첫 반응은 잠정적으로 교회내의 사회적 관계에서 물러나고 싶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고전적인 전통의 일반형태-신비적전통과 금욕적 전통-를 따르는 것이다.

이런 것은 보통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운동에 개입되기 전에 사회적 정치적인 각성이 있었다면 성령운동으로 하여금 그 각성이 더욱 강화된다.

성령운동 자체가 사회정치적 각성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정치적 각성이 단연 가톨릭문화의 일부인 까닭에 일반적으로 가톨릭성령운동자들이 정치 생활과 사회생활에 개입되어왔다.

또한 성령운동은 보다 가톨릭 적이면서 복음화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 같은 발전은 완전히 체험위주이 종교적인 바탕을 조성하려하지 않는 한 환영해야한다. 그러나 성령운동에서 대표되는 체험적인요청이 왜 가톨릭교회와 합치될 수 없는 가는, 그것이 가톨릭의 기도와 성사생활과 구조의 객관적인 요소에 의해 견제되기 때문이다.

공식적 반응

언젠가 미국 내의 전통 있는 교회들 측에서는 신성령 운동(Neo·pentecostalism)에 대해 어떤 판단을 시도하려 한 적이 있었다. 장로교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현상에 처음부터 불만을 드러냈다또한 장로교파를 제외한 모든 교파가 성령운동을 방언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다. 주류교회의 반응도 특기할 것이 못된다. 객관적인평가를 방해하는 일들, 특히 그 체험을 자기네들의 신학적 전통 속에 결합시켜 충분한 신학적인 기초를 쌓지 않고 문화적인유산, 성서해석, 교외 등을 고전성령운동자들로부터 넘겨받아 신학적 유산으로 삼으려는 초기 신성령 운동자들의 강한 경향 때문에 역사 있는 교회들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미국의 통합장로교위원회는 상당한 연구와 함께 성숙한 신성령 운동의 전통이라는 장점을 가졌다 그들의 보고서는 통합장로교신자들로 하여금 성령 운동 종파들과의 접촉을 환영함과 동시에 다른 크리스찬들의 통찰력을 감수하며 또한 거기에 응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성령운동이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지만 않으면 집회에서 배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마가톨릭 주교들의 보고서 역시 성령운동을 방언하는 것과 동등시하는 것보다 종교적 체험의 부흥과를 동등시하고 있다.

K. 맥도널 신부·미국인·베네딕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