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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쇄신운동 - 무엇이 문제인가?] 2. 평가에 있어서의 문제점들 1

K.맥도널 신부·미국인·베네딕또회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7-30 제 1115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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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아닌 하나의 영성,  전교파에 적용
기도의 욕구 충족원의에서 비롯돼
방언등에 한정되지 않음 명백히 해야 
궁극목표는 성령안에서의 충만한 삶
성령운동은 3년 전에야 비로소 가톨릭신자 사이에 나타났다. 필자 K·맥도널 신부는 인류학자 팀과 더불어 4년간 그 운동 전체의 역할을 연구한 후 국외자가 그 운동에 대해 객관적이 되기 어려운 이유를 말해준다. 그는 기도회를 이야기하고 그 운동의 강점과 약점을 나열한다. 그는「성경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선학자며 과학자로서 이글을 쓰고 있다.<편집자>

성령운동은 듀켄 대학에서 시작된 신(新)성령 운동의 한 형태이다. 이 성령운동은 하느님의 모임 교파와 성신강팀 성교회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형태와는 구별되며 역사 있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접할 수 있는 글은 과학적인 것은 못되지만 사적인 관찰로 다음과 같은 시험적인 결론에 이른다.

-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성령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에 이르기는 어렵다.

1、 성령운동에 대한 태중의 이미지는 너무나 많은 부정적 요소들을 품고 있어 어떠한 판단이라도 가장 부정적일 수가 있다. 성령운동은 감정주의, 광신주의, 종교적 광기, 문맹, 반지성주의, 구세주적 태도, 기적을 촉구하는 것 등의 열망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고전 성령운동에서도 사실상 널리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많은 성령운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괴이한 발전을 뉘우치게끔 이끄는 신학적, 사회적, 문화적 인각성도 일어낫다.

2、객관적 평가는 전통적인 크리스찬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체험에 관한 두려움 때문에 가로 막힌다. 가톨릭은 십자가 요한과, 정적주의자들의 단죄로부터 신비적 狂喜에 대한 불신을 물려받았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족서는 경건주의와 그 미국식 형태인 부흥운동 때문에 위협 당한다고 느낀다.

3、 많은 미국 대중들은 방언을 말한다든가, 해석하는 것, 예언하는 것 등의 성령운동의 종교적인 현 상이 사회적으로 인정 되어질 수 없다고 본다.

4、그 운동의 관찰자들은 방언을 말하는 것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이것이 그 운동의 주된 관심사라고까지 여기. 실제로 성령운동자들은 서령께 완전히 개방되어 그의 선물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방언의 선물은 그 상한 것을 잘하지 않는 크리스찬들 못지않게 감정주의적 성령운동을 무척 비난한다. 그 이유로 옛날의 수사들과 중세문필가들이 눈물의 선물과 같은 감정적 표현을 추구했고 그것을 위한 기도가 로마경본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들고 있다.

6、 방언이든지 예언이든지 해석이든지 식별이든지 성령의 선물의 성격자체가 객관적 판단에 도달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 그 선물들은 영적인 선물들이며 그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성 바오로는 말씀하신다. 「영적이 아닌 사람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만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영적이 아닌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코,전2,14)」

7、많은 이들이 성령운동을 구조적인 교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 운동이 교회의 법적테두리 밖에서 작용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거나, 성령의 선물이 부족하다고 교회를 비난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8、고전적 성령운동에서 자라난 결과(연설형태, 기도자세, 지능작용, 기대)를 프로데스탄트든지, 가톨릭이든지 어느 곳에든 옮기려고 시도할 때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킨다. 성령 강팀의 체험으로 변화된 가톨릭신자들은 그들의 가톨릭형제들의 길에 이 걸림돌을 두지 말고 오히려 성령운동의 영성을 그들의 문화적전통과 결합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역사적 뿌리를 가진 교회들은 성령운동자들 덕분에 그들이 소홀히 했던 전율, 즉 일상생활 속에서의 종교적 체험을 생생하게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전적 성령운동의 성서해석과 신학은 약하므로 무비판적으로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

-Ⅱ-

성령운동은 종파도 아니고 교의도 아니며 하나의 영성이고 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생활방식이므로·가톨릭이든지 루터교파든지 장로교파든지 적용될 수 있다.

그 중심적 관심사는 성령 안에서의 충만한 삶이며 그의 모든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간주되지만, 그렇다고 그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없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증거(사도행전2·1-42‥10·46··19·6)이지만, 가톨릭 성령운동자들은 거의 전 세계적으로 이 둘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배척한다. 가톨릭 성령운동자들에게 있어서는 방언을 말하든지 않든지, 성령세례를 청하면 누구나 받는다. 성령운동자들은 언어학자들이 회합에서 사용된 방언을 인정했다고 주장하지만 대 부분의 과학자들은 그 상황이 과학적으로 통제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인정을 심리적인 요인에 둔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방언이 참된 언어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가톨릭성령운동자들은 방언을 기도의 선물로서 더 주목한다. 그들은 자신들이기도에 크게 이끌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전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기도는 대부분의 가톨릭신자들보다 삼위일체적이며 처음으로 바탕에 있어서 찬미중심이 된다.

틀림없이 이 기도의 양상이 많은 이들을 이 운동에로 끌어당긴다. 그들은 제도적인 교회 안에서는 기도의 결핍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회의 구조와 분리되기를 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보다 다는 딱딱한 본당의 예절을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는 직접 체험적인 형태의 기도로 보충할 필요성을 느낀다.

성령운동자들의 용어로는 그들이 하느님을 목말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행사하는 것과 영신적인 성숙과를 등등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행사하고 있는 자가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선물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성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그 선물들은 교회의 몸을 건설 할 때(코·전12··27)와 조직체의 판단에 예속 될 때(코·전14··29)에만 가치가 있다.

모든 성령운동그룹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성령의 드러나는 작용중의 하나는 치유의 은사다.

오럴·브랜험 A·A·알런 등 치유의 봉사자들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문제를 일으킨다.

가톨릭 성령운동자들은 그들이 그러한 형태의 치유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 주어야한다.

그런데도 다른 많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점에서 가톨릭성령운동자들은 치유의 은사를 통한 성령의 드러나는 작용과, 고전적 성령운동의 결과를 항상 구별했던 것은 아니다.

-Ⅲ-

가톨릭의 성령쇄신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시작된 것은 대학에서다.

듀켄대학(핏츠버그 펜실베녀), 노틀담(노틀담 인디아나), 미사간주림(Ann Arbor), 아이오아주립(Ames), 홀리크로스(워체스터마사츄셋츠)대학에서다.

처음부터 신학·철학·물리·역사교수들과 박사과정의 학생들과 석사과정 학생들이 관련되었다.

처음부터 신학적인 자격을 가진 랠프·카이피 케빈·래너건 에드워드·오코너 신부(박사)그리고 나중에는 프랑시스·맥너트(O·P) 신부 같은 인물들이 그 운동을 이끌었다.

그 운동에 가입된 신학자들과 학위를 소유한 다른 신학자들이 가톨릭교회내의 성령강림의 체험에 대한 신학을 해마다 연구하기위해 1969년 5월 처음으로 모였다.

그 운동은 대학가에서 본당으로 수녀원으로 수도원으로 퍼졌다.

많은 트가피스트 수도원들(원장과 함께)이 가담했다. 봉쇄수녀들의 조용한 집들이 많은 사람들의 기도의 중심지로 바뀌기도 했다.

K.맥도널 신부·미국인·베네딕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