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랑의 대화] 75

김재만ㆍ교육학 박사ㆍ대구교대 교수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2-26 제 1094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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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면 지식은 무가치 
생활과 담쌓은 관념은 인생의 낭비 
교육은 가정에서 시작돼 가정에서 끝나
왜냐하면 부자집 자제들은 부의 그늘에서 이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이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 견디어 나갈 수 있도록 키우자면 학교에 보내서 그 어려움을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가난한 집 자제들은 사는 것부터가 큰 투쟁이요 살아남는 것은 곧 그 투쟁에서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속담에도『자식이 귀엽거던 여행을 시켜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생을 해야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몸으로 배우는 것이야말로 값진 교육입니다.

그 때문에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에 와서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을 학교에 전담시키고 가정교사에게 일임시키고 있는 일부의 부모들은 정말 한번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행동으로써 가르친다고 할 때도 그 행동은 반드시 그 안에 사고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행동이 바람직한 것으로 수행 되는데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행되는 것입니다.

그 과거의 경험이란 진리적 평가에 의하여 지식으로 정립되기 때문에 결국 행동 안에는 지식을 포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행동을 떠나서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 속에 지식을 포함한다고 해서 행동을 주장하나 지식을 주장 하나같은 것이라고 얼버무릴 수는 없습니다.

행동이 앞서는 교육을 하느냐 지식이 앞서는 교육을 하는냐 하는 것은 교육현실에서는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지식을 관념의 고정으로 본다면 그 관념을 중시하는 교육은 결국 정적(靜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그 대표적인 예를 도덕교육에서 본다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학교의 교육활동과목 중에서 교과적으로 다루어져 시험지위에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충성이나 효도를 행동적적으로 교육하고자 할 때는 학교 교육적 의미보다는 가정교육에서 교과활동에서보다는 과외활동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생은 생활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지식이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쓸 것입니까? 어떠한 관념일지라도 그 관념이 생활과 담을 쌓고 있다면 인생의 낭비가 아닐까요? 만약에 생활을 뒤로 제쳐놓고 관념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떤 모양이 될까요?

디오게네스는 여러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으로서 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행동이어야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이해를 낳고 이해는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도 부부간의 사랑도 사제간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도 다이원리로 귀결됩니다.

어버이와 자식 간의 사랑의 관계는 흔히 어버이의 사랑과자식의 효도로써 그 아름다운 광경을 그리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사랑 못한다는 것은 여기서 실감이 납니다.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어머니는 젖을 물리고 함께 자고식탁을 같이 함으로써 더욱 잘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한 그릇에 밥을 비벼서 같이 먹는 경우조차 있는데 일견 그런 짓은 비위생적으로 보일수도 있으나 모자상친의 방법으로서는 좋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 사랑한다는 원리를 가지고보면 식성(食性)까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머니의 식성을 닮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은 자식을 알고 이해하는데 체감(體感)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도 이 육체적 접촉만큼 강렬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잠들었던 경험이 있는 자식과 새가 새장에 갇히는 것처럼 갇혀서 혼자서만 잠들었던 경험이 있는 자식과는 그 모자관계가 스스로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현대과학의 여러 가지 구실을 핑계로 모자의 독립생활을 주장하더라도 애정학(愛情學)상의 이점(移点)은 동거에 있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피와 몸으로 얽혀진 모자관계가 무엇보다 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이 관계가 너무 강하여 장차의 부부생활에 있어서 부적응(不適)을 가져오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자관계의 사랑은 부부관계에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동안 사랑은 결코 감미롭지 못합니다. 부부애의 처음은 인간적 사랑이라고 할 것까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충동이 있고 그 충동에 입각하여 주고받음이 있고 그래서 이럭저럭 사랑의 성격이 나 타나게 되 것입니다.

적어도 본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을 알아야합니다.

김재만ㆍ교육학 박사ㆍ대구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