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랑의 대화] 74

김재만ㆍ교육학 박사ㆍ대구교대교수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2-19 제 1093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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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직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존재
인내는사랑의 가장 큰 미덕
행동이 따르지않는 지식은 궤변적 지식
동물은 훈련에 의해서 사람은 교육에 의하여 그 가치를 높이게 됩니다.

사람이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간단히 지육(知育)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수가 많은데 그때의 지식은 체육이나 덕육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지육이 다른 것을 포함한다 함은 그것이 정적(靜的)에서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에 행동이 따른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궤변적 지식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식에 행동이 수부 되지 않으면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철저히 행동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 가운데도 분명히 사랑은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꼬린토전서의 사랑(꼬린토13ㆍ1~13)>중략

사랑은 참아 줍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악을 보고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줍니다.

위의 성경말씀은 인내 겸손 관용 신뢰 등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느 하나도 공론적(空論的)인 표현이 아니고 실질적인 표현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행동 없는 사랑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행동 없는 사랑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숭고한 사랑의 원리가 있어도 거기에 행동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참아야하고, 친절하고, 항상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관용하며, 끝까지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는 곳에 사랑이 없습니다. 옛날의 우리 선조 등은 참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큰 미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딸이 시집을 가면 아버지는 그 시집가는 딸에게 마지막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백백자와 참을 인자가 적힌 백인(百忍)이란 종이였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부적처럼 소중히 간직되어 새 색씨의 방안에 장식되는 것었습니다.

참으라는 것입니다. 백번을 참아 란 뜻이지요.

그러나 여기백은 결코 구십구에 하나 더 있는 백은 아닙니다.

무한히 참아라는 뜻으로 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인내에서만 사랑이 싹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주는 것은 곧 인내의 결과인 것입니다.

잘못을 덮어주고 현재의 부족은 미래의 희망으로 믿으며 먼곳(理想)을 바라고 현실을 견디어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 현실적이라서 이 참는 미덕이 부족합니다.

걸핏하면 이혼이다 별거 다하여 부부간에 인내의 미덕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부부간이 그렇고 보니 다른 관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순간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여 무엇 하나 인내의 단맛을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를 몰라서라기보다는 그 원리를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행동이 합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진부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자꾸만 반복하여 주장되는 이유는 지식과 행동이 좀처럼 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지식은 행동을 포함하고 있고 행동은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철학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됩니다. 지식으로서 행동을 유도하려는 쪽과 행동으로서 지식을 결과하려는 노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로 전통적 교육형식에서는 지식으로 행동을 유도하려했고 이른바 새 교육조류에서는 행동으로서 지식을 결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김재만ㆍ교육학 박사ㆍ대구교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