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랑의 대화] 73

김재만ㆍ교육학 박사ㆍ대구교대 교수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78-01-29 제 1090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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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를 아는 사람은 총명하고 강한 사람
지성은 민주주의의 골격
나라의 위대성은 물질적 부 아닌 정신
영국의 윌슨수상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라의 위대성은 물질적 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에 있다』고.

이 말은 물질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정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영국에는 섹스피어가 있고 흄ㆍ바크레이ㆍ록크ㆍ스펜서오웬ㆍ넬슨ㆍ처칠이 있습니다.

영국의 정신은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영국의 정신적 지주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의 육신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있읍니다. 그들의 영혼입니다. 그들의 육신을 움직였던 그 정신들입니다. 육신을 움직이려고 했던 그 이상(理想)과 이념(理念)들입니다.

그 정신을 지성으로 대표하고 있읍니다. 그 지성은 위대한 민주주의의 골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것 인간을 위해서만 가치가 인정되는 지성이 영국을 위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아침에 진리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했읍니다. 이 진리는 곧 옳은 의미의 지식이지요, 옳은 지식을 깨닫는다함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는 공리공론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렇게 실천 없는 세상을 탄식하여 한 말씀일 것입니다.

세상이 하도 혼란하고 어지러웠기 때문입니다. 공자님이 살아계실 당시의 중국은 조그만 소국이 일백이십여개나 난립하여 있었다고 하니 가히 그 당시의 어지러움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나라이외에도 많은 방랑족이 있었고 무국적족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이스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아테네」거리에는 점잖게 차려입은 소피스트(智者)들이 휩쓸고 있었읍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많이 안다고 떠들며 다니는 그들 때문에 젊은이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읍니다. 거리엔 자칭의 지자(智者소피스트)가 우굴 됐지만 옳게 아는 자는 하나도 없었읍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 소피스트에게 혐오감을 느꼈읍니다. 실망을 했던 것입니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고뇌를 했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자칭 소피스트로부터 구해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물론 자칭 소피스트돌과는 판이하게 달랐읍니다. 나는 세상을 다 안다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만을 아는 것이 소크라테스였기 때문입니다.

가이레뿡이란 친구가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를 청했을 적에 소크라테스는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만이 내가 아는 전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정말 놀랄만한 선언인 것입니다. 감히 어느 선생님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으며 또 『그것만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덕을 동반하고 있읍니다. 덕은 원래 행동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행동을 동반하지 아니하면 소피스트의 그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孝子에게서도 볼 수 있는 교훈입니다. 노자는 그 표현을 역설적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지식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대단히 신중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아는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知人者 明 自知者 强)고 합니다.

총명하기만하면 남을 아는 것은 될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을 아는 데는 총명만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할 말이 없고 말을 많이 하는 자는 잘 모르는 법이라고도 하고 있읍니다. 세상에 지식이 정말로 인간을 사람하는데까지 될려면 이런 노자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고서야 어찌 소크라테스적 지혜에 도달되었다 하겠습니까?

오직 이 글을 쓰는 것조차가 두려울 따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저자들이 있고 또 있었습니다.

율곡선생도 퇴계선생도 다 훌륭한 지성인이었던 것입니다.

퇴계선생의 지식은 교화적 힘의 자본이었음에 대하여 율곡선생의 지식은 차라리 예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성이 다 같이 남을 교화하는 자본적 힘이 되고 만백성을 구제하는 힘이 되었기 때문에 힘으로써 경중을 논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사랑이 지식과 결부됨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계속)

김재만ㆍ교육학 박사ㆍ대구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