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특별진단] 세기 말적 이상기류 현상과 사이비 종교… ”그리스도 신앙과의 관계 및 역할”(하)

조규만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입력일 2011-04-13 수정일 2011-04-13 발행일 1997-03-09 제 2043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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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초자연적 힘도 창조물
교육 강화로 건전한 신심 활성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 절실해

글 싣는 순서

① 총론편: 전문가에게 듣는다

② 대중문화 속의 뉴에이지 운동

③ 열풍처럼 번져가는 기 체험과 초능력 수행법

④ 전생과 환생 신드롬

⑤ 풍수지리

⑥ 결론편: 그리스도 신앙과의 관계 및 그리스도교의 역할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나 불교 신자, 개신교 신자를 막론하고 비판없이 전생이나 환생 등 불교의 윤회설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영혼의 이주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마치 물을 수소와 산소를 쉽게 분리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는 플라톤 철학에서 유래하는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원론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몸은 영혼의 현현이요, 영혼은 그 몸을 통하여 그리고 그 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동반하고 보완하는 관계로 이해한다. 결코 한 영혼이 몸을 떠나 다른 몸에 이주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육신 부활」을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요약한「사도신경」에는「영혼의 불사불멸성을 믿나이다」가 아니라「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육신은 단순한 살 덩어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학은 인간의 살 덩어리로서의 육신 세포란 7년 또는 10년마다 새로운 것으로 대치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은 10년, 20년 후 전혀 다른 살 덩어리를 지니는 것이다. 40세가 된 사람에게는 10세였을 때의 살 덩어리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셈이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변함없이 부모의 자식으로서, 누구의 친구로서 존재한다. 다른 사람과 부모와 자식의 관계, 친구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육신의 기능이다.

「육신 부활」의「육신」은 이러한 역사성을 포함한다. 그가 바로 그일 수 있는 무엇을 의미한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육신 부활과 불교의 윤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죽은 다음에도 어떤 형태로의 삶이 있고, 또 이 세상에서 이룬 공과 탓에 의해 상과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의 원칙이 그렇다. 그러나 윤회설이 옳다면, 환생이 가능하다면, 그 상과 벌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서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환생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내가 전생에 인도의 공주였다고 하자. 무슨 잘못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 그 공주와 오늘의 내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그 개와 나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훗날 이 세상에서의 나의 선행과 악한 업적에 의해 나는 다른 존재가 될 것이다. 다른 존재로서 받게 되는 그 상과 벌은 나 자신에게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 신앙은「육신 부활」이라는 신앙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살았던 유일회적인 존재로서 죽은 다음에도 상이나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무엇보다도「영혼」만의 반쪽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구원되어야 하고 구원된다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이다.

◆창조주의 초월성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에 속하는 풍수지리설도 그렇다. 어떤 장소가 인간의 쾌, 불쾌를 좌우할 수 있다. 어떤 곳에 가면 안락함을 느끼고, 또 어떤 곳에서는 음산함을 느끼기도 한다. 좋은 장소를 가려 집을 짓고 도시 건설을 계획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비록 돌아가신 분이라 하더라도 그 시신을 좋은 곳에 묻는 것이 자식된 도리이다. 효를 다하지 못했을 때 그 자체로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성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마치 물리적 함수관계로 취급하는 일은 분명 도가 지나친 일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이 존재하시고, 하느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아니 신비롭게 창조된 우주와 인간이라는 결과를 놓고 그 원인으로서 그것을 창조하신 전능하고 초월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우주와 인간은 인간이 만든 컴퓨터나 자동차 등 어떤 작품과도 다르다.

인간의 그 어느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인간이 만든 작품은 그 자체로 발전해 나가거나 어떤 것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지 않은 이 우주와 인간은 그 자체로 스스로 진화하고 그와 같은 종류를 출산하거나 진화한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그 신비로움을 다 해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러한 창조물을 만드신 분의 초월성과 전능성의 일면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그 분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잠재능력, 우주가 가지고 있는 힘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한 속성일 수 없고, 하느님이 당신의 작품에 부여한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무궁무진한 잠재능력, 우주 안에 적용되고 있는 신비로운 힘을 계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하느님과 혼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초자연적 힘을 하느님과 동일시한다면 창세기가 일찍이 달에도 빌고, 태양에도 빌었던 사람들에게 태양과 별이 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일 뿐이라고 소개했던「비신화화」작업을 다시금 되풀이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초능력을 지닌 인간,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우주를 만드신 분이라는 것이 창세기의 기본 내용이다. 창세기는 일찍이 인간이 자신의 초능력으로 해서 하느님 앞에 오만을 부리다 실패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바로 바벨탑의 이야기다.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미 앞에서 그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 그 문제점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언급했다. 이 보고서에 대한 주교회의 답신은 아직 없었기 때문에 교회 공식적 대책은 언급할 수가 없다. 그러나「신앙교리위원회」보고서는 대책으로서 다음과 같은 안을 제시하고 있다.

1.교육의 강화: (1) 신학교육과 예비자 교리교육,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재교육의 강화 (2) 계시의 본질과 목적 및「사적계시」의 식별 방법에 대한 교육 (3)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문헌 소개 (4) 신흥종교의 실태와 선교 방법 및 문제점을 알리는 교육 (5)건전한 신심활동의 활성화

2.실태 파악과 대처: (1)「사적계시」의 경우, 그에 대한 조속하고도 상세한 실태 파악과 대처 (2) 교회 안팎엣 범람하고 있는 반 교회적 또는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출판물과 영상매체 음향매체들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 파악 (3) 이상과 같은 실태 파악을 위한 전담 연구기관 설립 또는 기존 연구기관의 활용

3.지도와 감독: (1) 교회 안의 신심운동과 기도운동에 대한 철저한 지도와 감독 (2)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그릇된 신앙 행동에 대한 즉각적인 제재 (3) 서적이나 출판물에 대한 교회인가제도의 강화 (4) 평신도들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 서적 출판사들에 대한 감독 방안 강구 (5)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이나 흐름에 대한 정보 교환

4.상담활동: (1) 신흥종교나 그릇된 신심운동 또는「사적계시」로 인해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상담기관이나 기구의 설치 (2) 신앙문제나 교리문제 등을 상의해 주는 상설기구의 설치나 팸플릿의 발간

5. 다양한 사목 프로그램의 개발: (1)정신적, 육체적 평화를 갈구하는 현대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각종 영성개발 방법과 피정 프로그램의 개발 (2) 인격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소공동체의 활성화 (3) 물질주의, 물량주의, 업적주의, 권위주의 등과 같은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의 유입 억제 방안 (4) 사회사목의 활성화를 통한 신앙의 개인주의, 신비주의, 내면주의의 극복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

이러한 대책들이 얼마만큼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분명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 교리를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이유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교육의 강화는 당연하다.

그러나 이미 언급하였고 또 대책에서도 제시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가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는 장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소외되어야 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보잘 것 없는 사람」일수록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만남을 이룰 때 비로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삶을 살 때 사람들은 선하시고 초월적인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어느 신부님이 마련한「잘못된 신앙 자세를 알아내는 방법 중 몇 가지 증상」을 소개하고 싶다.

1. 세상 마지막 날이 언제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

2. 입만 떼면 하느님, 성령, 성모님을 들먹이고 행실로는 가족관계, 이웃관계를 해치는 사람, 가정을 외면하거나 파괴하는 사람

3. 개인적 체험을 덮어놓고 하느님의 계시라고 믿고 퍼뜨리는 사람

4. 질병, 사고에만 집착하여 성령, 성모님을 들먹이는 사람

5. 우리 사회의「세상의 죄」를 외면하고 개인의 깊은 상처, 죄책감을 건드려 1백일 미사 예물, 헌금 등을 요구하는 사람

6. 복음정신인「가난한 삶」을 싫어하고 하느님, 성령, 성모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계시로 사업을 한다는 사람

7.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는 별 관심이 없고, 성령, 성모님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신심만을 강조하는 사람

8. 자유에로 부르시는 주님보다는 연옥, 지옥 형별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불안과 공포의 신앙을 조장하는 사람

9. 성령, 성모님을 들먹이며 권력자, 부자와 유착된 행동을 하는 사람

10.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웃, 세상을 위해 몸을 바칠 때 겪는 고통을 말하는 데, 개인적 고통을 덮어놓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라고 우기는 사람

조규만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