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특별진단] 세기말적 이상기류 현상과 사이비 종교… “그리스도 신앙과의 관계 및 역할” (상)

조규만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입력일 2011-04-13 수정일 2011-04-13 발행일 1997-03-02 제 2042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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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교회 모습도 한 원인
기존 종교에 식상… 신흥종교로 
무비판적 수용에 교리 내용 혼돈

글 싣는 순서

① 총론편: 전문가에게 듣는다

② 대중문화 속의 뉴에이지운동

③ 열풍처럼 번져가는 기 체험과 초능력 수행법

④ 전생과 환생 신드롬

⑤ 풍수지리

⑥ 결론편: 그리스도 신앙과의 관계 및 그리스도교의 역할

지난 1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신앙교리위원회」는 주교회의에 최근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이나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협하는 도전적 현상들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가톨릭의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운동이나 흐름을 8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1) 신흥종교운동: 가톨릭 신자들을 포섭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계 종파운동으로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엘리아 복음선교원, 대학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UBF, JMS(애천교회 창시자 정명석의 머리 글자) 선교단을 비롯한 다양한 성서연구 단체, 민족 신흥종교로서 대순진리회나 증산도, 오랜 신흥종교로서 SGI 한국불교회(전 창가학회), 천리교, 광명회 등이 활발히 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 시한부 종말론: 1992년 휴거설을 내세웠으나 실패함으로써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환경오염이나 핵 확산에 따른 위기 조성의 분위기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결부시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3) 사적 계시: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의 가르침과 상치된 것을 주장하며, 오늘의 교회적 상황이란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언하는 여러 형태의 사적 계시들이 난무하고 있다.

4) 뉴에이지운동: 우주의 중심을 하느님이 아닌 자연으로 보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 초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초능력을 위해 어떠한 방법이나 기술을 모두 동원하려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윤리적 무차별주의, 영성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신자들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되고 있다.

5) 건강이나 치병과 관련된 비술과 영술운동: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평화를 보장하는 국선도, 천도선법, 단학선원, 선도기공과 같은 기 운동이나 명상, 초월, 요가 등과 같은 비술과 영술들이 종교성을 띠고 있음에도 단순한 건강증진 운동으로 이해되면서 평신도는 물론 수도자, 성직자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6) 각종 예언술, 풍수지리, 전생, 환생 신드롬: 가톨릭 신앙과 교리에 전혀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쉽게 수용되고 있다.

7) 종교 다원주의: 역사상 상대주의, 종교간의 대화, 인간의 해방을 전제하며 출발하는 종교 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정체성, 그리고 유효성에 해를 가져다 주고 있다.

8)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나 교리를 비판하거나 왜곡하는 서적들이 대량 출판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사상적 요인이 있다. 아울러 기성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반성을 촉구하는 그리스도교 내적 요인도 있다. 그러한 요인과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인간의 삶에는 신비스러운 일들이 많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 첨단에 이르렀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비로운 일들이 있다. 과거 과학과 기술이 초보 단계에 있었을 때 이러한 신비현상들을「신의 일」이거나「기적」등 초월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인간 이성의 새로운 자각과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많은 신비현상들은 해명될 수 있는 자연현상이 되었다. 이처럼 당시 알 수 없었던 모든 자연현상을「신」과 동일시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작업을「비신화화」작업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런「비신화화」작업은 일찍이 창세기에서도 발견된다. 창세기 작가들은 태양, 달, 별들이 더이상 신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러한「비신화화」작업은 모든 신비현상을 좀 더 과학과 기술이 발전되면 해명될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급기야 종교를 미신, 또는「약자의 발명품」, 심지어「인민의 아편」으로 몰아붙였다. 하느님을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신의 죽음」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니이체의 경우 하느님은 인간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커녕 인간을 허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초인이 되기 위해「신의 살해」를 외쳤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과학시대인 현대에도 여전히 자연현상과 기적을 혼동하는 미신이 존재한다. 더욱이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었던 과학과 기술은 두 차례의 잔인한 세계대전을 겪게 했고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신흥종교에 대한 매력

산업화, 도시화를 가속시킨 이러한 과학과 기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경쟁에 돌입하게 하고 안주할 주변환경을 파괴하고 비인격화된 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대한 회의 내지 반발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발은 오히려 초월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에 관심을 촉구했다. 이것이 요즘 많은 사람들이 신흥종교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신흥종교에 이끌리는 데 교리 체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종교도 종교에 입문한 다음에 교리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지 교리를 알고 입문하려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려웠을 때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그리스도인이었는가? 불교도였는가? 증산교도였는가? 그러한 삶의 체험이 교리를 앞선다. 오늘의 현실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사랑을 이웃과 사회에 실천하였는가를 반성하게 한다.

한편 과학의 발전에 발 맞추어 점증하는 생태계의 파괴, 핵무기의 위험 더 격심해지는 국가간, 개인간의 빈부차, 고도의 기술적 테러 등의 불안한 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 종말에 관해 관심을 갖게 하였다.

1992년 10월 휴거설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주장이 황당무계한 것임을 입증했다. 그들은 이러한 사회적 불안에 맞추어 성서 중 일부 구절들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서의 묵시적 표현들은 당시 박해 받던 신앙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사용한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기법이다. 그들은 상징적 표현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있다. 또 박해를 받던 그들에게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것은 희망이었다. 이러한 희망을 그들은 공포스러운 것으로 전환시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성서의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희망을 제시한다. 예수는 종말을 완성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로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는 새들이 깃드는 겨자나무와 같은 아늑함이 표현되고 있다. 밭에 묻힌 보물이나 값진 진주를 발견한 기쁨이 비유되고 있다. 다만 인간이 세상 종말을 앞당길 수 있고, 그 종말을 끔찍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또 다른 한편으로 불안한 미래는 가능한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건강을 지키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이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다. 이 운동을 공식적인 단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규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NEW AGE란 이름 자체가 보여 주듯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로운 시대를 세우자는 사상을 통칭하는 것이다. 치병을 위한 침술과 지압, 민간신앙, 요가 명상법, 초인격적 심리학, 동양종교의 신비사상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물론 기성종교인 그리스도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화, 인류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느님 없이 인간 스스로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통해서 이룬다는 것이다.「그리스도 없는 구원」을 주장하고,「하느님 없는, 보이지 않는 종교」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인간은 하느님 없이 구원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배경에는 기성종교인 그리스도교의 탓이 없지 않다. 수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서로 비난하는 모습에 식상한 탓도 있다「하느님」의 이름을 내걸고 그 뒷면에 감추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욕심과 추악함을 경험한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들먹이면서 정작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일부의 교회 현실도 그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한 마디로「하느님」이라는 말을 듣지만「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세계의 시대적 특성으로 볼 수 있는 다원성은 종교에도 적용되고 있다.

특히 민주화된 오늘의 세계는 특정 종교의 배타적, 절대적, 진리 체계의 독점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언어, 문화, 풍습, 경제적 활동의 다양성과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해서 종교 자유의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 상호간의 존경과 예의도 마땅히 요구된다. 교회도 타 종교의 진리 추구를 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진리의 단일성과 보편성은 고수되어야 한다. 자신의 종교와 상대방의 종교를 상대화하는 것은 자신의 종교는 물론 상대방의 종교도 존중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만인을 존중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만인을 사랑하고, 원수조차 사랑해야 한다고 해서 자신의 남편이나 부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음호에 계속>

조규만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