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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6(끝) 사적 제318호 익산 나바위성당

김상재 기자
입력일 2011-04-12 수정일 2011-04-12 발행일 1997-02-23 제 2041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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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남은 개화기 한옥성당
구조ㆍ외관은 전통 목조양식 내부 공간은 바실리카식 절충
사적지 성당들이 예외없이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거나 지역 복음화의 요람이었던 것처럼 올해 1백 주년을 맞이하는 전북 익산 나바위성당도 우리 교회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헌종 11년(1845년) 10월 12일 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첫 발을 내디딘 감격적인 유적지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나바위성당은 개화기 한옥 성당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며 1998년 3월 국가 사적 318호로 지정 받았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토착화가 교회 건축의 근본 이념을 이룬 건축물인 나바위성당은 구조와 외관은 전통적 한국 목조 건축 양식을 따르면서도 내부 공간 구성은 서양 초기 그리스도교 양식인 바실리카식 교회를 따른 성당 건축사의 과도기적 건축물로 그 의의가 깊다.

본당 설립과 성당 건축

1897년 설립돼 올해로 1백주년을 맞는 나바위본당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J·Vermorel,장약슬) 신부가 용안군 안대동에 거주하면서 성당 부지를 물색해 김여산의 12칸 기와집을 매입, 안채는 사제관으로 사랑채는 성당으로 행랑 사랑은 본당 사무실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기존의 전통 한옥에 교회의 기능만을 수용한 것으로 박해기에 건축물 자체보다 병풍, 족자, 휘장 등의 가변적인 내부 치장으로 전례 공간의 요구에 부응한 것과는 달리 종교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1880년대부터 신부가 상주하는 집이 성당이 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이때의 성당들은 기존의 건물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남녀석 구분의 칸막이 설치, 출입구 개조 등 최소한의 시설로 전례 공간을 마련했다.

이는 건물을 지을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동시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반 백성에게 저항감을 주지 않고 전통문화와 충돌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1906년 베르모렐 신부는 전교에 주력하면서 성당 건립에 나서게 되는데 설계는 명동성당 건축을 감독하고 전동성당을 설계한 포와넬(Victor Louis Poisnel, 박도행) 신부가 도왔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

1906년 건축 당시 순수한 한식 목조로 건축되었는데 사용 목재는 임천 지방골 재목을 금강에 띄워 운반했다고 한다.

당시 건물은 정면 및 툇간이 마루로 되어 있었고 정면 가운데 성당을 상징하는 목조 종탑과 십자가가 위치해 있었으며 1911년 9월 18일 드망즈 주교가 방문하여 축성했다.

증축과 현재의 모습

나바위성당의 신축 당시의 모습은 정면 5칸 측면 13칸의 장방형으로 좌우 툇간 중 8칸씩과 정면 툇간은 툇마루이고 뒷툇간은 제의실이며 내진부분의 좌우 3칸은 익랑으로 전체적으로 T자 형을 이루고 있다

정면 용마루 부분에 작은 종탑이 솟아 있으며 지붕 아래 사방으로는 둘러가며 8각 채광창을 두어 광창 역할을 하게 하였다.

내부 공간은 중앙 열주에 의해 양분되고 내부 열주 사이에는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를 하였고 제대 부분에서는 열주가 멈추어 공간을 넓게 하고 양 기둥 사이에 영광의 문을 두어 제대를 향한 시선의 방해를 막고 지성소와 회중석의 공간을 분절시켰다.

완전한 중층 구조는 아니지만 낮은 툇간의 부섭지붕에 의해 광창의 설치를 가능케 하고 종축성이 강조된 점 등은 이전에 지어진 한옥 성당들보다 한층 발전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바위성당은 건축 10년 만인 1916년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정면 툇간에 덧붙여 증축하게 되는데 이때 목조로 된 벽을 헐고 벽돌로 개조했으며 마루를 없애 회랑으로 만들었다. 1916년의 증축으로 나바위성당은 한양 절충식 형태를 띠게 되는데 몇 개의 이형 벽돌을 사용한 장식 등이 완전한 서양식 교회 건축의 입면을 이루었다.

증축 때 사용된 벽돌은 여느 사적지 성당과 같은 회색과 적벽돌이었고 벽돌은 이 지방에서 직접 구웠으며 쌓는 일은 중국인들이 했다고 한다.

또 1922년에는 회랑의 기둥 아랫부분을 석주로 바꾸었고 1982년에는 종각 내부를 수리하는 한편 1백 주년을 맞는 올해 성당 내부를 수리했다.

본당의 발전과 과제

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주문모 신부가 6년 만에 순교하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떼였다가 다시 3명의 프랑스 신부를 맞이했으나 1839년 모두 잃어버려 6년 동안 또다시 목자 없는 암흑기를 지내는 한국 교회에 목자 그것도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유서 깊은 첫 발자국이 남은 나바위성당은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며 민족의 애환과 함께 해왔다.

1908년 8월 계명학교를 개설하여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교육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 참배를 거절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서북 지방의 공소를 관할한 나바위본당은 부근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하여 신자들에게 분배하고 인근 부락을 교우촌으로 만드는 등 활발한 전교활동으로 1929년 당시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신자 수가 3천2백 명에 이르기도 했다.

1949년부터는 간이 진료소라고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하여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아 왔고 1955년 김대건 신부의 황산포 상륙 1백 주년을 기념하여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를 제막하였으며 59년에는 극빈자를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1989년 화산과 나바위로 불리워지던 본당 명칭을 나바위로 확정했으며 1991년에는 본당 설립 1백 주년 기념 사업으로 수용 인원 3백 명 규모의 피정의 집을 완공해 김대건 신부의 정신을 본받고 신심을 수양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교적상 신자 3백여 명의 작은 시골 본당으로 본당 관할 안에 슈퍼마켓조차 하나 없는 열악한 상황이지만 굳건히 신앙의 유산을 지켜오고 가꾸어온 나바위본당은 이 모두를 김대건 신부의 보살핌이라고 믿고 있다

교회 내 문화유산을 가꾸기 위한 범 교구적 기금이 없는 현실 아래서 피정의 집 운영과 순례객들의 각종 기부금만으로 성지로서의 면모를 가꾸고 유지해온 나바위본당은 앞으로 적은 여력이나마 선조들이 살아온 모범을 따라 지역의 애환과 함께 하면서 고귀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보전하기 위해 전 신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김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