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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5. 사적 제290호 대구 계산성당

전대섭 기자
입력일 2011-04-12 수정일 2011-04-12 발행일 1997-02-16 제 2040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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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남 복음화의 산실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까운 벽돌조 지역 양심과 사랑의 보루로 우뚝
크고 웅장한 주교좌 성당 라틴 십자형태 뚜렷 
색유리로 창문 장식…서양식 중세풍의 성전
들어가는 말

오늘날 국가가 지정한 유·무형의 가톨릭 사적지들이 그렇듯이 계산성당 또한 영·호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중부 이남 교회활동의 심장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역할은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으로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구 계산성당 역시 사적지로 지정된 다른 가톨릭교회 건물들처럼 서양식 건축물이다. 정확히 말하면『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까운 벽돌조 성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현존하는 국내 가톨릭 사적지 대부분이 서양식, 다시 말해 고딕양식의 건출물인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알아보자.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서양식 건축물을 이 땅에 소개하고 본격적인 교회 건축물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바로 당시 한국에 진출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다. 종교자유 획득 이후 한국 교회를 이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근대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성속 이분법에 기초한 경건주의 신앙, 그리고 문화우월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다. 따라서 중세의 신학사상과 신념 체계를 잘 반영한 고딕양식을 교회 건축의 최고 이상으로 생각했다. 오랜 박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교회에 하느님의 승리를 드러내는 데도 교회 건축이 가장 적합했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을 법 하다.

계산동 한옥성당

지금의 계산성당 이전에 이곳엔 한식 목조 성당이 있었다. 1886년 본당 설정과 함께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지역의 전교를 위해 대구를 부임해 온지 11년 뒤인 1897년 현재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그곳에 있던 초가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다 3년 뒤인 1899년 전통 한옥 성당을 완공했다.

『회랍식 십자형 평면에 팔작 기와 지붕에다 사방 날개의 길이와 폭은 9척 3칸이고, 종횡장 모두 9척 9칸씩 총 45칸의 건물(약 1백여 평)로서 단청까지 칠해져 있었던 것』으로 옛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더우기 라틴 십자형 내지는 바실리카식 평면 일변도의 한국 초기 성당 건축물 가운데 희랍식 십자형의 집중식 평면을 한 것은 당시 이곳이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식 목조 계산성당은 지은지 2년을 못 넘기고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영남 최초의 고딕건축

1901년 2월 예기치 않은 화재로 한국식 십자형 성당이 소실된 뒤 로베르 신부와 신자들은 석재로 십자형 성당보다 더 큰 성당을 짓기로 하고 곧바로 모금활동에 들어간다.

설계와 감독은 프랑스인 로베르 신부가 맡았고 시공은 중국인이 했다.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프랑스와 홍콩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로베르 신부는 대구본당 신자들의 자발적인 봉사와 헌신적인 모금, 그리고 프랑스 신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1902년 말 2개의 종탑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까운 벽돌조 성당을 완공시켰다.

신축된 이 성당은 당시 대구에서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웅장한 고딕식 건물이 주민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성당 내부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세 행각 안에 세대를 설치했다. 또 1902년 10월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대구에 이송된 색유리(스테인드글라스)로 성당 창문을 장식해 서양식 중세풍의 성전 모습을 드러냈다.

새 성전의 축성식은 1903년 11월 1일 봉헌됐다. 모든 성인의 날에 거행된 대구 대성당 축성식에는 영호남 지역 신자 대부분이 참석했고, 이를 신기하게 여긴 주민들까지 모여들어 대구 전체의 축제의 날과 같았다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증축 이후 현재까지

1911년 4월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계산성당은 대구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됐다. 초대 감목으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교우 수의 증가 등으로 1917년 12월 주교좌 성당 증축공사를 추진키로 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종각을 두 배로 높이고 1902년에 완공한 성당 뒤쪽 익랑을 확장했다. 증축된 성당은 1919년 5월 11일 축성식을 가짐으로써 명실공히 대구대목구 내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주교좌 성당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영호남 지방 사목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다.

대구 계산성당은 지난 91년 대대적인 성전 보수공사를 단행함으로써 면모를 일신했다. 본당 설정 1백5주년을 맞아 시행된 성전 보수공사는 1902년 한강 이남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선을 보인 이래 89년 만에 이루어지는 첫 대규모 보수 복원공사여서 관심을 모았었다.

계산본당 측은 당시 그동안 건물 곳곳이 낡아 전면적인 보수 복원이 불가피한데다 신앙유산을 잘 가꾸고 보존한다는 취지로 공사를 단행한 것. 지붕은 함석을 벗겨내고 반영구적인 동판으로 보강했으며, 내외벽 연마 및 썩은 벽돌을 교체하고 창문과 출입문도 보수 혹은 교체했다. 설치 당시 국내 성당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았던 색유리도 복원시키고 종래의 마루바닥은 화강암으로 교체했다.

국가 지정 사적지

국가 지정 사적지 290호인 계산성당은 초기 성당이 대개 박해시대의 순교지나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마을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것과는 달리 예외적으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평면 구성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이며, 열주의 아케이드와 천장에 의해 신랑과 측랑의 구별이 뚜렷하다. 주 현관은 서쪽 정면의 배랑(narthex)에 위치해 있고 배랑의 좌우측랑부에 2개의 동일한 종탑이 위치한다. 종탑에는 각각 8각의 높은 첨탑을 뒀으나 건물 길이와 몸체 높이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성당의 내부는 신랑과 좌우 단열의 측랑으로 구성된 7개의 회중석 베이(bay)와 좌우 복열의 익랑을 갖는 3베이의 교차부 및 1개의 성단(sanctuary) 베이와 반원 보회랑 후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뒤로 5각의 앱스를 더 달아 제의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후진 상부 벽에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루르드의 성모 동굴이 꾸며져 있다.

전체 성당은 화강석 기초 위에 적벽돌과 회색 벽돌의 조적으로 회색 이형 벽돌의 사용은 플랫 버트레스와 정면 출입구의 아키볼트 및 창 둘레, 처마 코니스, 그리고 내부 열주와 천장 리브에 집중하고 있다.

좌우 측면에는 플랫 버트레스가 동일한 간격으로 벽을 지지하고 그 사이에 반원형 아치를 둘린 창이 있으며, 6번째 베이에는 반원 아치의 출입구가 돌출해 있다.

계산성당은 전체적으로 국내 성당 중 라틴 십자형(Latin cross)의 형태가 평면과 외관 및 내부 공간에서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건출물로 인정 받고 있다.

계산성당은 최근 노동법 사태와 관련 민노총 대구지부 관계자들이 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로 시민들에게 다가서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일회적 사건에 불과하겠지만 서울의「명동성당」이 한국 민주화의 성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구의 계산성당 역시 그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쨋든 올해로 본당 설정 111주년, 성전 신축 95년째를 맞는 계산성당은 오늘날까지 영·호남 지역 신앙의 산파로서, 또 지역 양심과 사랑의 보루로 우뚝 서 있음이 분명하다.

전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