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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4. 사적 제288호 전주 전동성당

김상재 기자
입력일 2011-04-12 수정일 2011-04-12 발행일 1997-02-09 제 203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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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순교지… 호남교회 모태
육중한 벽체에 비해 내부는 밝고, 색감 온화 이국적이면서도 토착적인 분위기
순교형장 성벽을 주춧돌로 삼아 전례기능 및 교회 개념 표현 극치
호남교회의 모태 본당인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권상연을 비롯하여 호남의 사도 유항검 등이 순교한 최초의 순교 성지이자 국가문화재 사적 제288호이다.

전동성당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호남지방에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건물일 뿐 아니라 건축양식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한국에 있는 교회 건축물 중의 으뜸으로 꼽힐 만큼 빼어난 까닭이다.

호남 교회의 풍파를 몸으로 겪어낸 전동성당은 이러한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큰 의의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오랜 세월 지역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존경을 받아온 만큼 그 사회적 의의도 크다고 할 것이다.

역사적 의의

전동본당은 선교사의 선교 정책이나 조선 교구장의 사목행정 방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고장 지도급 신도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한국 교회사의 출발과 꼭 닮은 이러한 전동성당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791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이후 전동본당은 거의 1백년마다 새로운 변모를 겪게 되는데 두 순교자의 순교 1백 주년이 되던 해에 현재의 성당 터에 자리를 잡았고 2백 주년을 맞이하면서 성당의 대대적인 보수 및 성역화 작업이 전개되었다.

또한 남문 밖 성지로만 알려졌던 전동본당이 순교 1번지로서의 자리매김을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전동본당은 1889년 설정되었으나 전주에 전라감영이 있었고 신도가 한 사람도 없어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가 전주에서 사목을 하지 못하고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에서 거주하면서 전주 입성을 모색했다.

1891년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은 보두네 신부는 당시에 있던 한옥을 임시 성당으로 개조하고 전교활동을 하다 20여 년 간의 절약 끝에 1908년 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설계는 명동성당 건축을 감독한 포와넬(박도행, Poisnel Victor Louis) 신부가 맡았다.

이 즈음 전주성 4대문 중 풍남문만 남겨두고 헐린다는 것을 알게 된 보두네 신부가 각고의 노력 끝에 헐린 성벽에서 나오는 흙과 돌을 성당을 짓는 데 사용했다.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를 지켜보고 유항검의 목이 효수되었던 그 돌과 흙이 성전의 주춧돌로 변한 것이다.

전동성당은 모진 고생 끝에 공사 시작 7년 만인 1914년 외형공사를 마쳤고 2대 주임 라크루 신부에 의해서 1931년 비로소 모든 시설이 완비되고 축성식을 가진 23년간의 대역사 끝에 완공됐다.

전동성당은 1947년 중앙본당이 설립되기 전까지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이었으며 1988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원인 모를 화재사건으로 대대적인 성전 복원사업이 이루어졌다.

건축적 의의

초기 성당으로는 드물게 대구 계산동 성당과 함께 평지에 위치한 전동성당은 건물 폭 16.4m 길이 49m 건평 1백89평으로 명동성당의 3분의 1 정도 크기에 5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전동성당은 정면 종탑부와 양쪽 계단탑에 비잔틴 풍의 총화형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성당의 평면 구성은 삼랑식이며 8각 석조 열주의 아케이드(아치를 연속적으로 사용한 개방된 공간)와 천장에 의해 몸체와 옆 복도의 구별이 뚜렸하고 열주 사이에는 반원형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주 현관은 북서쪽 정면의 배랑에 위치, 아키볼트(장식 창도리)로 장식되었고 상부에는 종탑부가 구성되어 있다.

종탑부에는 12개의 창을 돌린 12각의 드럼 위에 12각의 총화형 돔을 얹었다.

내부 공간은 명동성당과 같이 아케이드와 공중 회랑 및 광창의 3층 구성을 하고 있으며 몸체의 천장은 반원형 궁륭천장이지만 옆 복도와 제대부 및 보회랑은 교차, 뼈대 있는 궁륭천장으로 되어 있어 각 네모 칸의 공간들이 융합하고 상호 침투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육중한 벽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부공간이 밝고 색감 등이 온화하며 이국적이면서도 토착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체적으로 종탑부의 돔이나 부주두를 가진 석조 기둥 등 비잔틴 요소를 혼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외관과 세부 기법, 내부 공간의 인간적인 스케일감 등 어떤 면에서는 계산동성당과 명동성당을 능가하는 건물이다.

뿐만 아니라 전동성당은 내부 공간의 분절화 통일성 방향성 등을 통해 전례의 기능뿐 아니라 하느님을 표상하거나 지향하는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가톨릭 개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의의

한국 교회 최초의 자치 교구로 설정된 전주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전동성당은 그 시작에서부터 지역민의 애환을 함께 해온 지역사회의 보물이자 정의와 평화의 상징이었다.

해성중고, 성심여중고등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한편 대건신용협동조합 설립, 한솔야간학교 설립 등 지역사회 개발에 혼신을 다해 전동성당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은 지역에서 복음적 의미를 지녀왔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전동성당은 전북지역에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74년 11월 11일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를 비롯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의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시발로 정의 평화기원미사, 인권강연회 및 김지하 문학의 밤 등 크고 작은 집회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5월 광주 민주항쟁 이후 그 강도와 정의에 대한 열망은 전동성당을 집권자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87년의 6월 항쟁시에는 전동성당이 전북지역에서 시위대의 마지막 거점이 되어 연일 철야농성이 계속되었고, 88년부터는 시민들의 민주의식 고양을 위한 매월 시민강좌를 개최하였다.

이처럼 전동성당에서 시국문제 등에 관한 강연회와 각종 집회가 계속되던 1988년 10월 10일 성전이 원인 모를 화재에 휩싸이게 된다.

미온적인 당국의 수사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이 사건에 대해 관계자들은 특정 세력의 의도적인 방화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 화재는 본당 설립 1백 주년을 맞아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히려 더욱 굳건한 민주화의 요새가 되었다.

89년부터 94년까지 만 5년 간의 긴 성전의 보수공사 이후 전동성당은 비로소 이곳이 한국 최초의 순교지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되는데 이를 전동 신자들은 성령의 역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순교 1번지로서 새로운 도약

어려운 본당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전동성당이 현재와 같은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일화가 있는데 바로 치명생수의 개발이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객들과 지역 주민을 위해 생수를 개발하기로 한 전동성당은 전동본당 설립 1백3주년이 되던 1992년 업체와 지하 1백10m를 파기로 계약했다.

9월 19일 굴착을 시작한 생수 개발은 순교자 대축일인 9월 20일 지하 103m에서 기계가 고장나면서 물이 솟기 시작했다.

전동본당 신자들은 이물을 치명생수라고 명명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 터인 전동성당을 위상에 걸맞게 꾸미기 위해 전 신자가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순교 1번지를 상징할 구조물로 윤지충·권상연 순교 동상 건립, 각종 순교 책자 발간, 유항검과 동정부부 순교자상 건립, 순교자 현양 가든 음악회 개최 등 각종 순교신심 고양을 위한 행사를 펼치는가 하면 성당 소개 팸플릿을 제작, 전국에 배부해 전동성당이 한국 교회 내 첫 순교 성지임을 알리면서 전동성당 제 자리 찾기운동을 벌였다.

이제 확고히 순교성지 성당으로 자리매김한 전동성당은 앞으로 윤지충·권상연 순교일 및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일을 공식적인 기념일로 제정하는 데 총력을 모으는 한편 순교자 현양운동을 통해 시성시복운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다.

또한 전동성당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고려한 교구에서도 현재 사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주교관을 복원하여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전동성당으로 이사올 계획이며 차후 교구청을 전동성당 구내에 건립해 성당 일대를 인접한 성심여중고등과 함께 가톨릭 마을화할 계획으로 있다.

김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