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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3. 사적 제287호 인천 답동성당

최정근 기자
입력일 2011-04-12 수정일 2011-04-12 발행일 1997-02-02 제 203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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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여 년 정신·문화 중심 신앙 못자리·민주화의 산실 역할 다해
“콘크리트 14처… 현란한 스테인드 글라스…어우러져 아름다운 성당 건축의 백미로 손 꼽혀”
로마네스크 양식의 철근 콘크리트·벽돌 구조 혼용
1937년 4년간 외벽 확장, 현 성당 모습 갖춰 인천지역 등대로 ‘우뚝’…새 도약·변모 시도

항도 인천의 중심부에 자리잡아 근 1백10년 간을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해오면서 지역의 정신·문화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던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대성당(주임=이수일 신부)은 1981년 국가 지정 사적지 제287호로 지정됐다.

인천뿐 아니라 경인지역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했던 답동본당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과 현란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지어진 건축사적 의미도 함께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명동성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역이라면 답동 역시 인천지역 민주화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성당에는 개악된 안기부법과 노동법 원천 무효화를 위해 인천지역 청년 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농성 중에 있는 이 곳 역시 그리 순탄하지 못했던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해왔다.

건축 문화사적 의의

인천시의 중심부인 답동 낮은 언덕의 정상부에 위치한 답동성당은 1896년에 지은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을 확장 개축한 건물이다. 장호원 성당을 설계한 바 있는 지사원(Chizallet) 신부가 설계한 이 성당은 정면에 3개의 종탑을 갖고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답동은 이전의 서양식 성당과 달리 벽돌과 돌을 혼용하였으며 내부 기둥들과 2층 바닥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순수 자연석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벽돌조를 혼합했다.

1981년 9월 25일(문화재 관리국 자료)에 사적 287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답동성당은 정면 3개의 종탑 중 중앙 종탑에 비해 양 모서리의 탑은 왜소하며, 8각 튜렛(turret 작은 탑)에 뾰족한 돔을 얹었다.

답동의 창 형태는 모두 반원형 아치이며, 아치부와 창대만 돌로 되어 있다. 종래의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회색의 서로 다른 벽돌에 의한 정교한 장식을 석재로 볼딩 처리해 단순화·곡면화했다.

또한 성당 내부의 기둥 사이는 원형 아치로 연결되고, 기둥과 외벽의 반원형 편개주(반으로 자른 아치 기둥) 사이는 외벽 전체와 반원형 볼트(아치)로 연결됨으로써 반은 그로인(아치의 종류) 볼트, 반은 베렐(아치의 종류) 볼트의 특이한 천장의 형태로 되어 있다. 신랑(신자석)의 천장은 반원형 베렐 볼트이고, 제대부의 천장은 리브(부채살 무늬)있는 8각형 돔으로 되어 있다.

답동성당은 일제 후반기의 성당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크기에 있어 명동 성당 다음가는 규모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구조 전체는 순수 조적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벽돌 구조의 혼용이나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비교적 충실한 건물이다.

또 내벽은 모르타트 위에 수성 페인트를 바르고, 제대부 벽면은 진한 청색이며, 나머지는 미색이다. 바닥은 원래 목조 마루였으나 1973년 내부 수리 공사시 콘크리트 슬라브 위에 인조석을 얹었다. 벽면에 있는 콘크리트 14처와 추상적인 현대 디자인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어우러져 있는 답동성당은 아름다운 성당 건축의 백미로도 꼽히고 있다.

본당 설립과 성장

1996년 현재 총 신자 수가 3천6백66명인 답동성당은 인천교구 주교좌 본당으로 1889년 7월 1일 설립됐다. 설립 당시의 이름은 인천의 옛 지명인「제물포」로 불리다가 1958년「답동」으로 변경됐다. 성 바오로를 주보로 탄생된 답동본당의 초대 주임은 안중근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던 빌렘 신부이고 현재는 이수일 신부가 15대 주임이다.

답동성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이 장차 발전할 것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성당 대지를 물색하게 된 데서 비롯됐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에서는 당시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 지역을 맡아 주도록 요청, 빌렘 신부에 의해 본당 설립이 추진됐다.

빌렘 신부는 초대주임으로 발령을 받고 1889년 7월 8일 성당으로 쓰던 가옥에서 85명의 신자들과 첫 미사를 드리게 된다. 빌렘 신부는 다음해인 1890년에 어렵게 대지 3천2백12평을 매입하고 여기다 성당과 교리 교실을 건축하려다 용산 예수성심학교로 전임되었다. 빌렘 신부의 뒤를 이어 부임한 르비엘 신부는 이웃의 야산을 추가로 매입하고, 임시 성당 겸 경리부 건축을 시작하여 1891년 7월에 이를 완성한다. 그러나 그는 병으로 홍콩 요양소로 떠나게 된다.

답동성당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제3대 주임 마라발 신부 때다. 그는 1893년 4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했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수녀 2명을 파견하여 제물포 분원을 창설하고 보육사업과 무료 진료사업을 시작했다.

답동성당의 건립 공사는 1895년 8월 11일에 정초식을 갖고 1897년 7월 4일 축성식을 갖게 됐다. 당시 성당의 건평은 3백96평이었다. 또한 답동은 늘어나는 신자 수를 수용하기 위해 1937년부터 근 4년간 기존 성당을 그대로 두고 외벽을 쌓아 현재의 아름다운 성전이 완공됐다.

드뇌 신부 33년간 사목

답동성당이 선교의 거점으로, 또 인천의 명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은 1904년부터 1937년까지 근 33년 간을 주임신부로 사목활동을 했던 제4대 드뇌 신부 때부터. 드뇌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 부지(현 신흥동) 침입으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했고 특히 전교에 노력, 1910년까지 새말(현 시흥군 소래읍), 고잔(현 김포군 검단면), 구월리, 부평에 공소를 신설하고 영종도에 공소 강당을 축성했다.

드뇌 신부는 1915년 2월 1일「바오로 성인」을 본당의 주보로 결정하고 학교 운영에도 남달라 1917년 남 여부를 통합「인천 박문학교」로 개칭함과 동시에 설립자 겸 교장이 됐다.

이런 초창기 신부들의 노력에 힘입어 답동본당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임인 임종국 신부(5대)를 비롯 장요한(6대), 설 헨리꼬(7대), 강의선(8대), 박성규(9대), 김병상(10대), 김상용(11대), 송주석(12대), 강용운(13대), 정윤화(14대) 그리고 현재의 이수일 신부(15대)가 부임, 인천지역이 정신·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으로 발전시켰다.

인천지역 등대로 우뚝

멀리 바다와 인천 시내를 내려다 보는 답동성당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인천지역의 등대로 우뚝 서 있다. 문화적 가치는 물론 인천지역의 정신적 지주로서 의미를 갖고 있는 답동은 1989년 창립 1백 주년을 맞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더군다나 국가가 선포한「문화 유산의 해」를 맞아 답동성당이 명실공히 신앙의 요람, 정신 문화사적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답동 공동체 구성원은 물론 교구민 전체의 관심이 기대된다. 문화재로서 건물의 관리와 보존도 중요하지만 답동성당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더욱 존재 가치가 빛날 것이다.

이수일 본당신부는『도시 공동화 현상으로 신자 수는 현저하게 줄었으나 답동이 갖는 역사 문화적 가치는 여전하다』고 전하면서『지역사회에 열린 공간으로서의 성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최정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