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 문화유산을 찾아서] 2. 사적 제258호 명동대성당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1-04-12 수정일 2011-04-12 발행일 1997-01-26 제 203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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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진적 보루”
6년 난공사 끝 완공…5차례 보수 
중세교회 양식의 여러 특성 수용
“민주화운동의 산실…축성 1백 주년 맞아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재탄생 준비
한국 가톨릭교회의 최대 문화유산인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지금 수난을 겪고 있다. 한국 가톨릭 신앙의 모태일 뿐 아니라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요, 우리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최후의 보루로 지난 1백년 간의 위상을 견고히 다져왔던 명동대성당이 공동선을 외면한 공권력과 농성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더불어 국민의 정신적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더해온 명동대성당이 겪고 있는 오늘의 시련,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한국 가톨릭교회의 유형문화재이며 전 국민의 또 다른 의미의 무형문화재인 명동대성당이 이 땅에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를 함께 찾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명동 대성당은 1892년 착공, 6년간의 난공사 끝에 1898년에 완공됐으며 지난 1977년11월22일자로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258호로 지정받았다.

건립과 완공

명동대성당은 조선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1883년 6월부터 시작, 1899년 6월까지 30여 차례의 부지 매입작업 끝에 지금의 터를 확보했다.

명동대성당 터는 목멱산(남산) 줄기의 중간 재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선시대 때부터「북단재」혹은「종현」으로 불리던 곳이다.

명동대성당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1892년 8월 5일 성모 무염시태께 봉헌한 대성당 머릿돌을 축성하고 정초식을 가지면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용산신학교와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공사는 기초 공사를 담당한 약간의 조선인 석공을 제외하고는 중국 상해의 목공과 석공, 벽돌공, 노동자들이 도맡았다.

하지만 재정난과 자재난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기술이 미숙해 공사 중 붕괴사고가 일어나자 설계를 변경해 종탑의 높이를 낮추는가 하면, 바닥의 타일 주조, 천장의 아치형 공사, 스테인드 글라스, 제대 설비, 성 베네딕도 상과 예수성심 제대 제작 때마다 새로 기술자를 부르거나 외국에서 자재를 들여와야만 했다.

명동대성당은 공기 6년 만인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종탑 46.7미터, 길이 68미터, 너비 29미터, 면적 4백27평의 고딕 양식으로 완공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됐다.

건축 개요

명동대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 지원과 신자들의 노력 봉사와 성금으로 건립됐다. 준공 직후의 독립신문 기사에서는 총 공사비가 6만 달러로 보도되었다. 건축 관계자들은 지금 건립할 경우 부지와 예술품을 제외한 실공사비만 해도 최소 50억 원 이상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명동대성당은 지형과 진입로에 따른 주변 여건에 의해 정북에서 30.5°서쪽으로 기울어진 북북서쪽에 입구를 가진 남북 배치 형태를 하고 있다. 평면 구성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이며 구조 방식은 벽돌조로 일반 벽체, 기둥 등을 구성하고 있다. 주요 목구조로는 지붕의 트러스 구조와 내부 궁륭(두 개의 둥근 천장의 교차에 의해 형성된 부분) 천장 구조, 종탑의 종 지지 구조와 뾰족탑 구조 등이 있다.

성당 내부는 채광 면적을 높이기 위해 높은 창의 창턱 부분과 그 하부 벽체가 예리하게 절삭되어 유리 접착 부분까지 급경사 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동대성당은 또 한강통 연와송에서 우리 흙으로 제작한 붉은색과 회흑색 벽돌로 지어졌는데 붉은 벽돌은 배경을 이루는 일반 벽체에만 썼고 회흑색 이형벽돌은 장식 효과를 내기 위해 부축벽, 기둥 등의 주요 골조 부분과 돌림띠, 창 테두리 등에 사용했다.

성당 내부의 공간은 고딕적 분위기에 비해 단순한 외관과 견고한 벽체, 분절적 구조의 노출 등 구조 체계와 공법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게 건축해 중세 서양 교회 건축 양식의 수용이 갖는 여러 특성 즉 건축 체제의 비고딕적 성격과 고딕 지향적 건축 계획, 비고딕적 구조, 벽돌 재료의 의장적 고딕 적응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수공사

명동대성당은 1898년 축성 후 지금까지 5차례의 큰 보수공사가 있었다. 1925년에는 기해·병오박해 79위 순교자 시복식을 기념해 복자 제대와 복자 성화를 장식했고, 다음 해에는 14사도(바오로와 바르나바 포함)의 상본을 장발(루도비코) 선생이 제작해 설치했다.

일제 말기에는 쇠붙이 공출령에 따라 철제 영성체 난간이 강압적으로 공출돼 목재로 교체됐으나 노기남 대주교의 완강한 저항으로 종만은 공출을 면했다.

명동대성당은 노기남 대주교 허락으로 1944년 6월 11일 지붕과 벽체 등이 대대적으로 보수됐다. 시설로는 1946년 종각 피뢰침이 설치되는 등 두 번째 보수공사가 실시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유리화가 파괴되고 성모무염시태 상이 훼손됐으나 그 외 큰 피해는 없었으며 1958년 7월과 8월에 성녀 소화 데레사 상과 예수성심 상이 안치됐다.

이어 1964년 8월 황민성 신부가 14처 상을 교체하면서 세 번째 보수공사를 실시했고, 제13대 주임 최석우 신부는 1972년「명동대성당 복원보수위원회」를 구성, 6월부터 네 번째로 대대적인 복원공사에 착수, 지붕과 벽체 보수공사를 실시, 1973년 말 제14대 김몽은 신부가 마무리했다. 또 1982년 유리화 복원공사와 지붕 동판 보수작업을 실시해 다섯 번째 보수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아울러 1991년 1월부터 7월까지 명동대성당 축성 1백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구성돼 교구와 본당이 함께 1백주년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1995년에는 1백주년 기념관 설계 경기를 개최하고 모금운동을 시작,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회적 역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역할이 재조명되면서부터 1960년대 이후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소외된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로 자리잡아 왔다.

유신 독재에 항거한 1971년 김수환 추기경의 성탄 강론을 시작으로 불 붙기 시작한 명동대성당의 사회운동은 1975년 2월 6일 인권회복기도회와 1976년의「3.1 명동사건」즉「민주 구국 선언문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이어 1978년 동일방직사건, 1979년 안동농민회사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인한 시국 선언문 채택과 집회들이 이어졌으며, 1986년 6월 10일 명동성당 농성과 촛불 시위는「6·29 선언」을 낳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명동대성당은 1995년 6월 한국통신 노조 사건과 관련, 과거 군사독재시대 때에도 없었던 성지 침탈을 당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이 땅의 민주화와 힘없는 이들의 양심을 대변하는 자리로 지켜왔고 지금도 개정 노동법과 안기부법 철폐문제와 관련 사제들과 신자, 많은 시위대들이 찾아와 시국 기도회와 농성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변신

명동 대성당은 성당 축성 1백주년을 기해 미래 교회상에 맞는 선교와 신자 재교육, 시민들의 문화공간, 정보서비스센터 등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 종합개발사업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총 사업비 1천억여 원을 예상으로 벌이고 있는 이 사업은 우선 지난 해 96년 6월 1일부터 98년까지 1단계 준비작업으로 1백억 원을 모금할 예정이다.

명동본당 주임 장덕필 신부는『명동 대성당 1백주년 기념관은 건물 중심의 공간이 아닌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누구나 와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평안함을 얻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라며 『명동대성당의 종합개발계획은 명동 신자들만의 몫이 아닌 전국 모든 신자들, 그리고 명동대성당을 성지로 생각하는 모든 국민들이 동참해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명동대성당은 가톨릭 신자들만의 성지가 아니라 전 국민이 인정한 성역이다. 이를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어떻게 가꾸어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 지난 1월 12일 주의 세례 축일 때 발표한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 말씀에 명확하게 담겨 있다.

김 추기경은 명동대성당이『종교적으로는 언제나 성역이지만 법적으로는 성역으로 보존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오로지 우리 모두가 이 자리를 성역으로 존중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천명했다.

김 추기경의 말씀 대로 모두가 명동대성당을 성역으로 존중할 때 사랑과 평화, 화합의 성지가 될 것이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