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67. 성 안토니오 은수자

고종희(한양여대 교수·http://blog.naver.com/bella4040)
입력일 2011-04-05 수정일 2011-04-05 발행일 2011-04-10 제 2741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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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고통 초월한 ‘수도생활의 모범’
속세 떠나 오랜 세월 극단의 외로움 견뎌
명성 듣고 모인 제자들 위해 수도원 설립
마귀 유혹 이겨낸 성인의 일화 그림으로
히에로니무스 보쉬, ‘성 안토니오의 유혹’, 캔버스에 유채, 131.5 x 119 cm, 리스본, 국립 고미술박물관.
성 안토니오 은수자(251∼356)는 251년 이집트 북부의 고마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복음의 이 구절이 성 안토니오의 마음에 깊이 와 닿은 것은 지주였던 부친이 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는 말씀대로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사막으로 들어가 한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20세 전후였다. 이후 그는 오래된 공동묘지로 홀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13년간 수도생활을 했으며, 35세가 되었을 때 또다시 인적 없는 더 깊은 곳으로 수양을 떠났다. 그곳에서 다시 또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생명을 연명할 정도로 최소한의 음식만을 섭취하고 극단의 외로움을 견디며 기도 생활을 했다.

306년 그는 은둔자의 삶에서 나와 그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제자들을 위해 수도원을 세웠다. 311년에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막시미아누스 황제 시절 박해를 받고 있었던 그리스도 교인들을 위로했고, 박해가 잦아들자 수도원으로 돌아와 나일강 근처의 피스피르라는 곳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제자들과 함께 수도원 생활을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물고기가 물이 마르면 죽듯이, 수도자도 수도원에서 멀어져서 세속 사람들과 섞여 기도를 멀리하면 스스로를 잃게 된다.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야 하듯이 우리는 우리들의 기도방이 있는 수도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흔히 그를 최초의 수도자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수도원을 설립했고, 엄격한 수도 생활의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338년 87세가 됐을 때 아리안 파를 반박하기 위해 한 차례 더 알렉산드리아에 간 것을 빼고는 이후 줄곧 수도원에서 생활했으며, 105세라는 긴 생을 살다가 영면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수도원 설립과 수도생활은 이후 그리스도교의 수도원 규칙 및 생활에 모델이 되었다.

성 안토니오 은수자와 관련해서는 그가 홀로 수도생활을 하던 중에 마귀가 끊임없이 그를 유혹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은 성인이 마귀로부터 숱한 유혹을 당하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는데 다양한 모습의 마귀에 화가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멋진 예술작품으로 둔갑했다. 이 그림에서 성인은 높은 하늘까지 들려진 후 떨어지는가 하면, 돈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 이 장면은 그 중에서 마귀들이 금욕, 금식 생활을 하던 성인을 온갖 음식으로 유혹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공주로 변장한 마귀가 유혹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화가의 관심은 여인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에도, 맛깔스러운 음식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에도 있지 않고 보다 기괴하고, 창의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데 있다. 괴상한 마귀가 들고 있는 계란을 접시에 담아 들고 오는 하인, 코가 나팔처럼 생긴 가상의 동물, 다소 모자란 듯한 사람들의 표정 등 무엇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수사 복장을 한 성인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분홍색 옷의 공주 역시 장신구로 치장한 것을 빼고는 유혹에 넘어갈 미인이기는커녕 그로테스크한 얼굴로 인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사실주의가 지배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이 진정한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제작된 지 5세기가 지난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서였다. 보쉬의 작품이야말로 원조 초현실주의 회화였던 것이다.

고종희(한양여대 교수·http://blog.naver.com/bella4040)